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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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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션으로 사랑을 말하다

독일 베를린 북한대사관서 벌어지는 정치적 음모 다룬 류승완 감독 <베를린>… 최고치의 액션 뒤엔 순애보의 비극적 사랑
등록 2013-02-01 07:27 수정 2020-05-02 19:27

지난해 10월 경기도 일산의 한 편집실에서 류승완 감독을 만났을 때, 그는 어떻게 하든지 일전을 피하려는 분위기였다. 그때 그는 막 촬영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참이었다. 어떤 영화인지, 뭘 얘기하려는 영화인지 제대로 공개된 적이 없던 때였다. 영화를 숨기려고 극력 애쓰는 표정이었다. 스무고개가 진행됐다. 그가 간신히 입을 떼기 시작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존 르 카레 얘기부터였다.

와도 빗댈 만한 액션물

“존 르 카레의 , 로버트 러들럼의 , 프레더릭 포사이스의 뭐 그런 등등의 첩보 스릴러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렇다고 그중 어느 하나를 닮았다고 얘기하는 건 아니다. 그 작품들을 워낙 좋아했고 언젠가 같은 장르의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해왔다. 이번에 그 기회가 온 것이다.”

제목 때문인지 아무래도 르 카레의 소설 분위기가 많이 연상됐다. 둘 다 동·서독을 갈랐던 베를린이 무대니까.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는 그 모든 예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류승완은 이번에 실로 엄청난 첩보 액션 스릴러를 탄생시켰다. ‘엄청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류승완식의, 그러니까 지금까지 숱하게 나온 그 많은 첩보 스릴러와는 다른 지평선에 서 있는, ‘자기만의’ 작품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류승완은 를 찍기 전까지는 바로 그 전의 작품 가 최고였다. 이번 이 나오기 전까지는 또 가 최고였다. 그는 한발 한발 자신의 최고 기량을 뿜어내고 있다. 스스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감독은 종종 자신의 전작을 복제하는 경향을 선보인다. 정점을 찍은 감독일수록 그다음 영화는 예전 것만 못한 경우가 많다. 류승완이 점점 더 나은 평을 얻는 이유는 아직 정점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을 두고 흔히들 ‘최강 액션 스릴러’라는 표현을 쓴다. 한때 ‘액션키드’라는 소리를 들었던 감독은 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액션 감각을 최고치로 끌어올린다. 오프닝신에서부터 영화 내내 줄곧 이어지는 총격신은 한마디로 가차 없다. 총격신을 가장 드라이하게, 그래서 역설적으로 가장 리얼하게 찍는 감독으로 흔히들 마이클 만을 꼽는다. 류승완의 이번 영화 은 잔혹하면서 서정적인 마이클 만의 를 연상시킨다. 총격의 소음과 사방으로 튀어오르는 파편 속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기묘한 대비를 이룬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맞는 얘기 같다. 살인병기로 키워진 첩보원들은 살육의 현장에서도 그렇게 표정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은 ‘제이슨 본 시리즈’에도 빗댈 만한 액션물이다.

은 독일 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음모 얘기를 다룬다. 북한 대사 리학수(이경영)가 있고 그 밑에 행동대장 격인 표종성(하정우)이 있다. 표종성은 가공할 능력의 공작원이다. 북한에서는 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는 현재 베를린에서 테러조직에 무기를 밀매하고 그 자금을 북한에 빼돌리는 일을 한다. 그의 아내 련정희(전지현)는 베를린 주재 대사관의 통역관이다. 그러나 통역 일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녀에게도 비밀스런 임무가 주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 와중에 북한 보위부 간부인 동명수(류승범)가 모종의 임무를 띠고 베를린에 나타난 것이 화근이 된다. 그의 출현 이후 서로 죽고 죽이는 혈투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여기에 이 모두를 뒤쫓는 남한 첩보요원 정진수(한석규)까지 합세하며 사태는 점입가경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사랑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로 베를린영화제를 가게 됐다. 감전된 듯 영감이 왔다. 이상했다. 냉전이 이미 끝났음에도 그 잔해가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시대의 비극성 같은 것? 그 느낌을 우리 얘기로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왔다. 은 역사의 비극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얘기다. 베를린이든 여기 한국이든.” 류승완 감독의 설명이다.

영화는 쫓고 쫓기는, 물고 물리는 첩보전 양상으로 진행되는 척하면서 사실은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련정희가 숨기고 있는 비밀은 무엇인가. 그런 련정희를 위한 표종성의 선택 또한 결국 무엇인가. 은 점차 가슴속으로 순애보의 비극적 사랑을 밀어붙인다. 사람은 절대 거대담론의 추상적 이론으로 행동 동기를 마련하지 않는다. 아주 구체적인 것, 예컨대 내 남자 혹은 내 여자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기 마련이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주체적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이 보여주려는 것은 액션이 아니라 사실은 러브 스토리다. 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그 안에 담겨 있는 희생과 그것을 위해 필요한 용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버릴 수 있는가. 지금껏 우리가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그 무수한 이념 따위는 과연 무엇이었던가. 궁극적으로 이 질문하는 지점은 거기에 서 있다. 결코 간단치 않은 액션 스릴러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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