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히치콕에게 던지는 뮤지컬 도전장

동명 영화 <레베카>와 같은 뿌리의 뮤지컬 국내 초연… 러브 스토리를 자처한 뮤지컬에서 불안감을 조성하는 집사의 존재가 인상적
등록 2013-01-25 20:42 수정 2020-05-03 04:27

뮤지컬 는 대프니 듀 모리에의 고딕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소설보다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동명 영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편이 맞을 것 같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두 작품은 세월과 장르의 변화를 타고 어떻게 달라졌는지, 히치콕의 1940년작과 국내 초연되는 실베스터 르베이의 뮤지컬을 비교해봤다.

스릴러와 러브 스토리를 결합한 뮤지컬 ‘레베카‘에서 댄버스 부인(왼쪽)은 미스터리를 극대화하는 역할을 한다. 댄버스 부인은 막심(오른쪽)의 전처인 레베카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며 ‘나’(가운데)를 협박하고 갈등을 일으킨다.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스릴러와 러브 스토리를 결합한 뮤지컬 ‘레베카‘에서 댄버스 부인(왼쪽)은 미스터리를 극대화하는 역할을 한다. 댄버스 부인은 막심(오른쪽)의 전처인 레베카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며 ‘나’(가운데)를 협박하고 갈등을 일으킨다.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유쾌하고 달콤함, 가볍게 처리된 불안

“어젯밤, 맨들리에 다시 가는 꿈을 꾸었다. 차도로 통하는 철문이 나를 막고 있었다. 빗장을 지른 문 앞에서 잠시 주춤거렸지만, 나는 꿈에서 흔히 그렇듯 갑자기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해 유령처럼 그곳을 통과했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히치콕의 는 ‘나’의 내레이션과 함께 관객을 맨들리 저택으로 안내하며 시작된다. 비밀스러운 중세의 성 같은 맨들리 저택으로 가는 길은 실타래처럼 엉킨 도로, 폐허 같은 숲과 수상한 그림자로 가득하다. 음침한 저택을 비추던 달빛은 이내 ‘손으로 얼굴을 가리듯’ 구름이 가려버린다. 악몽이다.

반면 뮤지컬의 1막은 달콤하고 우아하게 시작된다. ‘나’가 무대 앞에 설치된 스크린에 그리는 그림과 함께 프롤로그 넘버인 로 시작한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선율에, ‘나’의 목소리는 청아하게 울린다. 그림 뒤로 윤곽을 드러내는 맨들리 저택의 내부 역시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줄었다. 뒤이어 몬테 카를로의 화려한 호텔을 재연한 무대가 단번에 눈을 사로잡고, 전처를 잃었다는 사교계의 유명 인사 막심 드 윈터와 재능 있지만 가난한 고아인 ‘나’가 사랑에 빠져 결혼하기까지는 유쾌하고 달콤한 분위기가 흐른다. 막심의 변덕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나 그를 사랑하게 된 ‘나’의 불안감은 영화에서보다 훨씬 가볍게 처리됐다.

영화와 뮤지컬이 가장 뚜렷하게 차별화되는 지점은 댄버스 부인이다. 막심의 전처인 레베카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며 새 안주인 ‘나’를 위협하는 집사 댄버스 부인의 존재감은 뮤지컬 쪽이 훨씬 강렬하다. 영화에서 댄버스 부인은 거의 걷는 모습을 보여주는 법 없이 유령처럼 갑자기 등장했다 사라지곤 한다. 못생기고 경직된 표정과 외모에 비해 레베카의 혼령에 세뇌당한 듯 불안한 눈빛이 인상적이다. 댄버스 부인이 ‘나’의 불안하고 어두운 마음속 소리처럼 나직하게 속삭이며 ‘나’를 노이로제 상태로까지 몰아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관객도 따라서 숨이 막히는 듯한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뮤지컬에서 댄버스 부인은 더없이 드라마틱하고 강렬하다. ‘나’에 대한 미움보다 레베카를 숭배하는 마음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나’의 맑고 여린 목소리와 대비되는 그로테스크하고 힘이 넘치는 목소리도 그렇거니와, 반복되는 메인 테마 역시 폭발하는 듯한 고음과 웅장한 선율로 관객을 몰아붙인다.

댄버스 부인 캐릭터의 이런 변화 때문에, 뮤지컬에서는 ‘나’의 불안감을 조성하는 방식도 영화와는 조금 달라진다. 영화에서의 ‘나’는 사사건건 레베카와 비교당하고, 모든 일이 맨들리에서 이방인으로 시험당하는 처지다. 그녀는 ‘안주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해야 한다는 과제를 부여받으나, 레베카의 머리글자인 ‘R’가 수놓인 모든 사물과 방, 심지어 인물들까지도 감정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일 없이 그녀를 서서히 옥죄는 방식으로 압박을 가한다.

클라이맥스는 댄버스 부인의 노래

반면 뮤지컬은 댄버스 부인이 강렬해진 만큼 그녀와 ‘나’의 대립에 극의 모든 갈등을 집중시킨다. 노이로제를 일으킬 듯 묘한 분위기는 하인들이 ‘나’에 대해 안주인감이 아니라고 수군거리는 합창으로 대체하고, 프랭크나 막심의 누나는 전적으로 ‘나’의 편이 된다. 그런 만큼 뮤지컬의 클라이맥스는 레베카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이 밝혀지는 막심의 솔로 가 아니라 2막의 시작을 여는 댄버스 부인의 노래라고 할 만하다. 보랏빛으로 신비롭게 치장된 레베카의 방에서 ‘나’가 슬픔에 잠겨 댄버스 부인에게 맞서는 순간, 무대의 중심은 바다를 향한 발코니가 된다. 파도 치는 바다를 향하고 있던 발코니가 객석을 향해 돌아서며, 댄버스 부인이 가장 강렬한 를 마친 뒤 ‘나’에게 바다로 뛰어내려 자살하라고 종용하는 는 과감한 무대 연출과 파워풀한 음악이 어우러져 소름 끼칠 정도로 매혹적이고 드라마틱하다.

스릴러의 고전이 된 영화가 ‘나’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몰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줬다면, 오히려 스릴러 요소를 가미한 러브 스토리를 자처한 뮤지컬의 시작과 끝은 갈등과 미스터리를 극대화하는 댄버스 부인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불안과 공포를 다루는 스릴러 장르가 러브 스토리보다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는 방증일까. LG아트센터에서 3월 31일까지

김지현 시나리오작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