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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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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는 자살 혹은, ‘투표’

의지하던 부부가 똑같은 비극적 선택을 하는 영화 <아무르>와 <볼케이노>…세계 1위 노인 자살률을 가진 나라에서 선거는 노인들의 인정투쟁이 아닐까
등록 2012-12-25 20:54 수정 2020-05-03 04:27

고독사한 독거노인의 97%가 자식이 있었다는 통계가 나왔다. 자녀는 더 이상 부양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독거노인만 문제가 아니다. 노인들끼리 사는 가구는 점점 늘어나는데, 이들이 아프거나 죽어갈 때 누가 어떻게 돌봐야 할 것인가? 나라에서 예산을 늘린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보살핌은 감정의 결까지 포함된 복합적인 문제다. 노부부가 서로 의지하며 살다가 한 명이 쓰러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최근 프랑스와 아이슬란드에서 만들어진 영화 와 는 공교롭게도 같은 답을 내놓는다.

생의 끝까지 노인이 노인을 돌보아야 하는 사회에선 우아한 노년도, 죽음을 이겨낸 사랑도 없다. 영화 의 한 장면. (주)티캐스트 제공

생의 끝까지 노인이 노인을 돌보아야 하는 사회에선 우아한 노년도, 죽음을 이겨낸 사랑도 없다. 영화 의 한 장면. (주)티캐스트 제공

지극한 부부의 참혹한 선택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 의 조르주와 안느는 음악가 출신의 80대 부부다. 어느 날 아내가 잠시 동안 멍한 결신발작 증상을 보이고 나서 다정한 노부부의 삶이 흔들린다. 뇌경색 수술을 받고 오른쪽 편마비를 얻어 집으로 돌아온 아내는 “다시는 나를 입원시키지 말라”고 부탁한다. 남편은 열심히 간병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아내는 짐이 되는 게 싫다. 그러나 아내가 자기 몸을 통제하는 힘은 점차 약해진다. 자며 오줌을 싸고, 말을 똑바로 하지 못한다. 뇌졸중의 후유증 중 하나인 혈관성 치매 증상이다. 딸과 사위는 입원시키자고 하지만, 이는 아내의 뜻이 아니다. 아내는 물과 음식조차 삼키지 못하며 천천히 말라간다. 보살핌을 받는 사람이나 보살피는 사람이나 점점 무력감에 젖어들기는 마찬가지다. 당신이 노인이라면 변해가는 배우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남편은 병원에 보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게 해달라고 실랑이를 벌이다 아내의 뺨을 때린다. 결국 남편은 아내를 베개로 눌러 질식사시킨다. 남편은 꽃으로 시신을 장식하고, 방문을 테이프로 봉인한 뒤 장문의 편지를 쓰고 사라졌다. 딸이 그들의 집을 찾았을 때 잠긴 문 뒤로 아내의 시신은 꽃에 둘러싸인 채 썩고 있었다. 영화 는 일생 동안 지극한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아온 노부부가 참혹한 선택을 하게 되는 과정을 차분히 보여준다. 이 어쩔 수 없음도 사랑이 아니겠느냐고 조용히 반문한다.

영화 에서 하네스는 30년간 수위로 재직하다 퇴임하는 날, 불현듯 자살을 시도한다. 며칠 뒤 진짜로 죽을 고비를 넘긴 그는 자식들의 대화를 엿듣고, 그들이 괴팍한 아버지를 싫어하고 엄마를 연민한단 사실을 알게 된다. 이제라도 다정한 남편이 되리라 결심한 그는 아내와 오붓한 시간을 갖지만, 다음날 아내가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아내는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다. 남편은 자식들의 만류에도 아내를 집에 데려온다. 그는 열심히 간병하지만 조금씩 지쳐간다. 출가한 자식들은 가끔 방문할 뿐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의식불명 상태에서 꺼이꺼이 우는 소리를 내는 아내를 남편은 베개로 눌러 질식사시킨다. 그는 아내의 영구차와 함께 평생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간다. 에서 남편의 간호와 살해가 과연 아내를 위한 최선이었는지는 의문이다. 평생 무뚝뚝하던 남편이 결심만으로 중증 환자의 수발을 감당하긴 힘들다. 아내는 의식이 없기 때문에, 남편이 ‘안락사’시켜주길 원했는지도 알 수 없다. 우울한 나머지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은 아니었을까. 초반의 자살 기도처럼. 어쨌거나 남편의 행위는 비밀에 부쳐진다. 성스러운 장례식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결말은 윤리적 난제를 호상으로 봉합해버리는 것으로 읽혀 동의하기 힘들다.

 

누구를 위한 호상인가

호상이라니 생각난다. 강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영화 에서는 주차관리 일을 하는 군봉이 치매에 걸린 아내를 정성으로 돌본다. 그러나 아내가 암까지 걸린 것을 안 그는 출가한 자식들을 불러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뒤, 연탄불을 피워놓고 아내와 자살한다. 자식들은 모르도록 자살의 흔적을 없애달라는 유서를 친구에게 남긴 채. 친구는 장례식장에서 ‘호상’이라고 말하는 문상객들에게 “늙은이가 죽으면 다 호상이야?”라며 소리친다. 가난한 노부부가 끝까지 스스로 생계와 병고를 책임지다 감당이 안 되자 알아서 조용히 죽는 이 영화에는 노년의 현실보단 낭만적인 시선이 넘친다. 영화 속 다른 노인들도 마찬가지다. 사연에 비해 지나치게 곱상한 할머니의 모습이나, 작은 복지에도 감지덕지하는 것, 노년에 진정한 사랑을 만났지만 자식들 귀찮게 하지 않고 조용히 헤어지는 등의 서사는 노인들의 입장이라기보다는 젊은이들이 원하는 ‘착한 노인상’이 아니던가. 관객은 노인들의 사랑과 헌신을 보며 감동할 뿐 책임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이는 물론 사회적 멘털리티의 반영이다. 한국은 전체 인구의 12%가 65살 이상인 고령화 사회다. 노인 자살률은 부동의 세계 1위로, 20대 자살률의 4배고, 유럽 노인 자살률의 6~7배다. 매년 1천 건이 넘는 고독사가 발생한다. 그러나 노인들의 죽음은 젊은이들의 죽음에 비해 관심을 받지 못한다. 보편적 복지와 보살핌의 문화가 정착되지 못한 한국 사회에서 선거 때마다 존재감을 드러내는 노인들의 표심은 혹시 조용히 죽어가지 않겠노라는 인정투쟁의 발로가 아닐까. 노인들의 빈곤과 고독과 박탈감을 돌보는 공동체의 노력만이 반동의 회귀를 막는 진실한 대안이 아닐까.

황진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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