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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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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꿈 깨!

계급사회의 현실을 들추며 20대의 분투를 응원하기보다는 그 노력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독특한 드라마 <청담동 앨리스>
등록 2012-12-25 20:48 수정 2020-05-03 04:27

1990년대 캔디는 김희선이었다. 1999년 방영된 드라마 에서 김희선은 전문대를 나와 구두 매장에서 판매 점원으로 일하면서도 구두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 한다. “좋은 구두를 신으면 좋은 곳에 갈 수 있을 거라는 꿈을 꾸게 되거든요.” 2012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대뜸 서울 소비의 도시 한복판을 찾아온 캔디, 문근영도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 한다. 더 이상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두고 봐. 나도 청담동에 샵 내서 성공하고 그리고 여기서 살 거다!” 캔디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SBS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 의 주인공 캔디는 욕망과 분노와 좌절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SBS 드라마 는 ‘청담동 며느리 되기’라는 목표를 향해 뛰어든 주인공을 통해 20대 여자의 현실을 비춘다. 진입에 성공한 친구(소이현·위)와 벼르고 있는 친구(문근영)의 처지는 하늘과 땅 차이다. SBS 제공

SBS 드라마 는 ‘청담동 며느리 되기’라는 목표를 향해 뛰어든 주인공을 통해 20대 여자의 현실을 비춘다. 진입에 성공한 친구(소이현·위)와 벼르고 있는 친구(문근영)의 처지는 하늘과 땅 차이다. SBS 제공

 

이상한 동네의 삐딱한 캔디

10년 넘는 세월 동안 캔디를 바라보는 시선들도 바뀌었다. 에서 ‘분수에 맞지 않는’ 세계를 넘본 주인공은 주변 사람들의 질투와 의심에 시달린다. 자신을 증명할 길은 하나뿐이다. 착한 마음을 잃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것. 구두 디자인을 100장, 200장 스케치하고 직접 가죽을 다듬으며 모진 시험을 당하는 신데렐라 드라마는 당시에는 트렌드였지만 지금은 고전이다.

가까스로 패션 회사 1년 계약직이 된 의 주인공은 자신이 투명인간이라는 걸 알게 된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이 없다. 디자인팀장은 그를 미워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그가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할 뿐이다. “네가 입은 옷을 좀 봐. 후진 건 네 스펙이 아니야. 안목이지. 안목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안 달라지는 거야. 태어날 때부터 무엇을 보고 느꼈냐에 따라 결정되지.” 사회가 그를 차갑게 거부할 때 의 주인공은 고향인 제주도로 도망갈 궁리라도 할 수 있었다. 한세경(문근영)에겐, 그의 친구들에겐, 중간 계급쯤에 파묻혀 살 수 있기를 바라는 20대 젊은 취업 준비생들에겐 퇴로가 없다. 거품 잔뜩 든 부동산을 대출 끼고 사서 최고장을 받아든 여주인공의 가족이나, 막 회사에 들어간 아들에게 거듭된 수술과 항암 치료로 빚만 잔뜩 안겨준 남자친구(남궁민)의 어머니를 어찌할 것인가. 남자친구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너랑 나 사이에서 태어난 그 아이는 무슨 죄야. 무슨 죄로 나처럼 살아야 돼? 네가 알던 나는 괜찮은 사람이었는지 몰라도 지금 나는 사람이 아니야.” 깡통 아파트 끼고 사는 집안을 보며, 떠나간 남자친구를 보며, 사회의 매서운 눈초리를 느끼며 2012년의 캔디는 재빠르게 타락한다. 그전까지는 결혼해서 팔자를 고치려는 친구들을 경멸했다. 이젠 하루아침에 사모님이 된 고등학교 동창이자 경쟁자 서윤주(소이현)야말로 진정한 능력자임을 깨닫는다.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나는 나를 바꿀 거야. 너처럼 살 거야.” 는 우리가 처한 강고한 계급사회의 현실을 들추며 20대의 분투를 응원하기보다는 그 노력을 희롱하고 웃음거리로 만드는 독특한 드라마다. 그럼으로써 더 날카롭게 벼려지는 질문이 있다. 청담동의 욕망, 20대의 욕망, 연애의 욕망은 과연 무엇이 다른가. 그 욕망의 본질에는 무엇이 있는가.

는 여러 고전들의 종합 세트와도 같은 드라마다. 친구 윤주는 처럼 자신을 부자 나라로 안내해줄 시계토끼를 찾으라고 충고한다. 디자인 회사에서 연필 한번 못 잡고 쇼핑 심부름만 하는 주인공의 처지는 영화 의 주인공 처지와 별로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대놓고 ‘키다리 아저씨’ 코스프레하는 남자 주인공(박시후)이 있다. 현실이 각박해진 대신 판타지는 더욱 깊어졌다. 이 가파른 신분의 사닥다리 맨 위에 어딘가 결핍에 시달리는 남자가 있을 거라는 환상이다. 결핍이 지나친 나머지 통속에는 자유로운 남자 말이다. 애당초 박시후는 가난하고 애달픈 20대 커플의 사랑을 후원하려 했다. 그러나 ‘불치병보다 무서운 가난 때문에’ 문근영 커플이 헤어지자 여주인공의 후원자가 된다. 조울증에 시달리는 이 키다리 아저씨의 욕망은 누군가에게서 순전히 인간적인 감사와 사랑을 받는 것이다. 자신이 손쉽게 이뤘던 성공을 되돌아보며 20대 청년에게 이런 말을 던질 때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실현되리라 믿는다. “인생엔 말이야, 지나가는 일과 지나가지 않는 일이 있어요. 가난은 지나가는 일이야. 나도 지나갔지.” 문근영 말마따나 현실감각 떨어지는 이야기다. 서로에 대한 감사와 사랑은 한 번도 온전하게 전해지는 법이 없다. 예전 드라마에선 여주인공이 ‘오해 마니아’였기 때문이라면, 에서는 그 어떤 인간적인 감정도 계급이라는 간유리를 거치면 굴절돼 엉뚱한 곳에 착지하고 말기 때문이다.

 

“가난은 화를 내야 하는 거야”

루이스 캐럴의 소설 에서 앨리스는 여왕을 이겼다는 이유로 사형당할 뻔한 찰나에 깨어난다. “앨리스, 앨리스!” 현실에서 그를 놓지 않았던 언니의 목소리 덕분이다. 빌려 입은 명품으로 청담동에 뛰어든 앨리스에게 출구가 있을까? 친구들은 이미 팔려갔고 부모님은 대형마트에 치여 자기 코가 석 자다. 대신 드라마에서 문근영은 모험을 떠나기 전 표지를 남기고 간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하다면 그건 부끄러워해야 하는 게 아니라 화를 내야 하는 거야.” 이곳이 입구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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