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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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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 40년, 마임이스트 입을 열다

춘천마임축제 만들어 마임을 축제의 장으로 끌어들인 유진규 데뷔 40년 정리하는 ‘유진규의 진술 공연’
등록 2012-12-15 02:48 수정 2020-05-03 04:27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었다. 서울에 32년 만에 내린 초겨울 폭설이랬다. 미끄러운 길에서 예술가는 여러 차례 기우뚱했다. 이내 중심을 잡고 불 밝힌 카페를 향해 총총 걷는 뒷모습을 보며 그의 40년도 그 길을 걷는 일과 비슷했으리라 짐작했다. 마임이스트 유진규가 데뷔 40년을 맞아 12월3·5·7일 서울 중구 저동 삼일로창고극장에서 ‘유진규의 진술 공연’을 열었다. 함께 무대에 올라 ‘진술’한 동료와 후배들은 여러 차례 ‘소외된 예술’이라는 말을 썼다. 차갑고 미끄러운 바닥을 딛고 한 발씩 나아가듯 위태로움 속에서도 그는 광대들의 몸짓으로만 치부됐던 마임을 예술의 영역으로, 소외에서 축제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데 온 인생을 쏟았다.

‘유진규의 진술 공연’은 일생을 한 장르에 파고든 예술가의 40년을 돌이키는 시간이었다. 유진규씨가 공연계 후배인 유홍영 극단 사다리 예술감독, 오성화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축제감독(왼쪽부터)과 무대에 함께 올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춘천마임축제 제공

‘유진규의 진술 공연’은 일생을 한 장르에 파고든 예술가의 40년을 돌이키는 시간이었다. 유진규씨가 공연계 후배인 유홍영 극단 사다리 예술감독, 오성화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축제감독(왼쪽부터)과 무대에 함께 올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춘천마임축제 제공

 

격일로 한 번뿐인 공연

“호흡 조절하며 공연을 하려고 격일로 잡았는데, 이거 원 더 긴장만 되고….” 두 번째 공연을 앞둔 12월5일 만난 예술가는 이제는 단련되기도 했으련만 여전히 무대에 서는 것은 떨리는 일이라고 말했다. 유진규는 3일 동안 자신의 마임 인생 40년을 관객에게 전했다. 이번 공연을 여는 삼일로창고극장은 그가 처음 몸담은 극단인 ‘에저또’가 1975년 개관한 극장이다. 강원도 춘천에 정착하기 전인 1980년대 초까지 주요 작품을 발표한 장소이기도 하다. 무대에서 몸으로만 이야기했던 예술가는 예의 열정이 곳곳에 스며 있을 그 공연장을 찾아 마임 인생 처음으로 입을 열기로 했다. “이번 한 번만. 이전에도 없었어요. 목적은 하나, 40년을 한길로 온 예술가가 있어요, 그것도 특이한 분야로. 내가 출발할 때와 비슷한 나이, 20대의 젊은이들이 있을 거예요. 어떤 길을 가야 할까 고민하는 불안함도 있을 거예요. 내가 선배로서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해주면 두려울 때 용기를 얻고 가능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빨리 포기해버리거나. 이런 얘기를 강연처럼 하면 또 내 스타일은 아니고, 그래서 생각한 것이 쭉 해왔던 형태의 공연, 진술 공연이에요.”

공연을 앞두고 마임 인생에서 큰 획을 그었던 시기를 정리해보니 세 개로 나뉘었다. 수의학도에서 마임에 뛰어든 대학 시절부터 독일의 마임이스트 롤프 샤레의 내한 공연을 보고 마임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공연을 했던 시간, 결혼과 함께 춘천으로 거처를 옮기며 무대를 떠났다가 1987년 다시 돌아오기까지가 첫날 공연에서 진술한 내용이다. 두 번째 날에는 본격적으로 ‘마임 운동’을 시작한 시절에 대한 회고다. 무대를 가지는 것조차 인정받지 못했던 마임을 대중에게 인식시키는 것은 치열한 운동의 과정과 같았다. 춘천마임축제의 모태가 된 한국마임페스티벌을 열고, 그것을 지역으로 옮겨왔다. 굿 예술가인 무세중의 말에 따르면 “몸짓을 천박하게 생각했던 풍토에서 빈손으로 춘천을 끌어안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겨우 축제다운 축제를 꾸리나 싶을 무렵 병을 얻었다.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죽음을 준비하며 머리를 식히려고 지리산 자락의 한 절을 찾았다. 조용히 명상이나 하려고 떠났으나 들판 한가운데 선 절은 마을의 소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스님에게 좀 조용한 암자를 소개해달라고 하니 조용한 곳에 가면 조용한 대로 또 다른 소음이 자신을 괴롭힐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속 끓였던 마음의 소음에 대해 생각했다. 각박하게 다퉈야 했던 관계들을 정리하다 보니 자연스레 병이 나았다. 세 번째 공연은 그다음의 이야기들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그는 ‘마임이 꼭 몸으로 말을 해야 하나’라는 질문을 던지며 설치와 공연이 결합된 작품들을 발표하고, 전위적인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여전히 총대를 메고 이끌어나가는 춘천마임축제는 올해 24회를 맞으며 세계 3대 마임축제로 성장했다.

 

“못 움직이면 관객을 움직이게 하면 되지…”

결과적으로 춘천마임축제가 크게 성장했고, 그의 이름은 한국 마임의 대표 격으로 분류되지만, 지난 3일간의 공연은 한 예술가의 성과 혹은 죽음마저 이겨낸 예술혼 같은 거창한 것을 말하는 시간이 아니었다. 유진규는 지난한 세월을 돌이켜보며 “그것은 하나의 생존 게임이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바라고 마임 운동을 하지 않았어요. 오로지 마임을 살리겠다는 신념으로 지금까지 온 거죠.”

굳이 힘든 길만 선택해온 예술가의 다음 목표는 어디일까. “목표란 것은 없어요. 정하게 되면 해야 하고, 정해놓는 순간 거기에 매이게 되는 그런 삶은 싫죠.” 다만 어렴풋이 그리는 미래가 있다면 저 멀리 생의 끝까지 공연을 붙들겠다는 간절한 마음, 그러나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는 애틋한 마음이다. “내 몸 어느 한 부분이 움직일 때까지 내 작업을 할 것이라는 것. 손만 까딱하고 눈만 끔뻑여도 공연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못 움직이면 관객을 움직이게 하면 되지, 그런 생각도 하고. 그리고 언젠가는, 동물들 보면 마지막에 혼자서 사라지잖아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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