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미 영화평론가
는 슈퍼히어로물이자 슈퍼히어로물이 아니다. 가 사회실험 장면을 비롯해 선악과 정의에 대한 법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면, 는 무장봉기의 환영을 통해 체제 절멸의 공포를 환기하는 정치영화다.
극심한 양극화, 두 개의 고담시
(2005)는 백만장자 웨인이 배트맨이 된 전사를 파고든다. 고담은 악에 물든 도시다. 어떤 악인가? 범죄가 들끓고 부패가 만연한 것은 현상일 뿐이다. 핵심은 부의 불평등이다. 고층 빌딩이 즐비한 도시의 뒷골목은 거지와 잡범으로 우글댄다. 웨인의 트라우마는 부모의 죽음이다. 고담시 최고 갑부였던 부모는 뒷골목 잡범에게 살해된다. 그들은 ‘착한’ 부자였지만, 자선은 빈곤과 범죄를 없애지 못했다. 웨인은 자신의 나약함으로 부모가 죽었다는 죄의식과 분노를 품고 세상을 떠돌다, ‘라스 알굴’을 만나 ‘어둠의 사도’로 거듭난다. 라스 알굴은 고대로부터 타락한 도시를 응징하는 세력으로, 고담시를 멸하려 한다. 이를 반대한 웨인은 라스 알굴을 죽이고 고담시로 돌아와, 배트맨이 되어 고담시를 구하려 한다.
라스 알굴은 고담시에 ‘불황’이란 무기를 썼지만, 웨인 부모의 자선으로 절멸이 늦춰졌다고 말한다. 자본주의적 위기를 자선과 복지로 넘기며 체제를 연장했다는 뜻이다. 라스 알굴은 자본주의적 모순이 극대화된 고담시를 응징하는 심판자이자, 체제를 붕괴시키는 내부 모순을 외부화한 이름이다. 에서 라스 알굴은 ‘공포’를 활용한다. 공포를 유발하는 독가스를 살포해 시민들의 내면적 공포를 끄집어내 서로 죽이게끔 하려는 그의 계획은 배트맨에 의해 저지된다. 이는 9·11 이후, 테러에 대한 공포가 사회구성원 전체를 서로 반목시키는 심리적 공황상태로 이끌었음을 유비한다. (2008)는 무정부주의자 조커를 통해 배트맨이란 영웅이 시민에게 위험을 안기는 존재가 되는 모순을 보여준다. 배트맨의 ‘법을 초월한 정의’가 실은 조커의 광기와 짝을 이루는 것이며, 선과 악이 동전의 양면임을 투 페이스-하비덴트를 통해 웅변한다. 법의 한계를 넘고자 정의를 꿈꾸었지만, 법을 초월한 정의의 불가능성과 선악의 모호함에 직면한 배트맨은 하비덴트의 죽음을 영웅의 죽음으로 만들고 모든 죄를 짊어진 채 퇴장한다.
의 배경은 하비덴트의 죽음으로 강력한 치안이 확립된 8년 뒤의 고담시다. 경찰들은 ‘평화의 시대’라 말하지만, 모순은 더 깊어졌다. 하수구에서 매달 익사체가 발견되고, 지원이 끊긴 고아들은 지하세계에서 일자리를 찾는다. 전과자들은 신상 공개로 새 삶의 기회를 얻지 못한다. 고담시 표면의 마천루와 완전히 유리된 지하세계. 극심한 양극화로 아예 ‘두 개의 고담시’로 분리된 곳에서 새로운 절멸계획이 작동한다. 라스 알굴의 후예 베인은 증권거래소를 습격한다. 증권거래소는 현금이 없어 도둑질이 불가능하다는 말에 “너희는 하잖아”라는 베인의 일갈은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월가에 분노를 표한 오큐파이 운동의 정서를 대변한다. 전산망이 뚫리면 주식도 하지 않는 소시민들 돈까지 휴지가 된다는 대사도 금융자본에 저당 잡힌 시민의 삶을 말해준다. 고립된 고담시를 탈출하려는 시민들에게 연방군이 총을 쏘고 다리를 폭파시키는 장면도 카트리나 참사 당시 백인 거주지까지 걸어갔던 수백 명의 주민 머리 위로 경찰부대가 총을 쏜 사건을 연상시킨다. 베인은 ‘착한 자본주의’ 웨인사의 제품이자 라스 알굴의 후계자가 개발을 지원한 원자로를 탈취해 핵무기로 활용한다. 베인은 고담시민 전체를 인질로 잡고, 공권력을 무력화해 ‘해방구’를 선포한다. 포스트 후쿠시마 시대에 자본의 집적물인 핵발전소가 언제든 핵폭탄이 될 수 있다는 공포와 계급혁명의 공포가 감지된다.
총기사건, 영화의 절멸 공포와 공명
영화의 계급혁명은 좌파의 상상과 매우 다르다. 조직된 노동계급의 대규모 봉기가 아니라, 소수의 급진화된 무장게릴라들의 권력 장악과 도시 천민들의 폭동이 결합된 양태다. 흡사 반공영화를 보는 듯한 인민재판 장면은 자본주의 체제의 절멸에 대한 우파의 공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민들의 반응은 모호하다. 전과자인 ‘캣우먼’이 배트맨을 돕는 것과 그녀의 친구가 베인에 동조적이라는 것 외의 묘사는 생략된다. 매몰되었던 정복 경찰들이 맨몸으로 행진하며, 무장 세력을 앞세운 빈민과 월가에서 맞붙는 장면은 아이러니하다. 고담시의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려는 마지막 세력이 시민이 아니라 경찰이며, 일반적인 민중봉기와 폭력과 비폭력의 구도가 뒤집힌 것에서 보듯 영화가 공권력의 입장에 서 있음을 드러낸다. 즉 영화는 양극화와 그로 인한 급진화로부터 ‘체제를 보호해야 한다’는 우파의 위기의식과, 고담시의 구원은 최고 갑부 웨인-배트맨의 숭고한 자기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역설한다. 는 고담(소돔과 고모라)을 멸하려는 구약의 하나님에 맞서, 추락과 자기희생을 통해 마침내 승천함으로써 인류를 구원하는 예수를 표상하기도 한다. 어느 것이든 현 체제가 맞닥뜨린 종말의 인식을 공유한다. 미국의 상영관 총기난사 사건은 영화가 그리는 절멸의 공포와 공명하는 사건이다. 사형과 추방의 양자택일에서 추방을 택한 자는 살얼음판을 걷다 죽는다. 자본주의 체제 앞에 놓인 길도 두 갈래다. 여기서 끝내거나, 살얼음판 같은 위기를 연장하다 망하는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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