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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점 vs 0점, ‘프로메테우스’ 논쟁

등록 2012-06-21 10:55 수정 2020-05-03 04:26
20세기폭스코리아 제공

20세기폭스코리아 제공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는 개봉하자마자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등 감독의 전작이 두말할 것 없이 새로운 탐사였던 데 비해 에 대한 시각은 엇갈린다. 어떤 이에게는 재앙이고 어떤 이에게는 묵시인 이 영화에 대해 2명의 영화평론가가 토론했다. 창조의 본질을 꿰뚫는 공포

장르로 가둘 수 없는 작가의 야망, 주류 영화의 주체적 시선을 뒤집다

리들리 스콧의 공상과학(SF) 영화들은 이 장르의 클리셰가 작가적 세계의 심오함과 잘 만난 사례들이었다. 는 SF 호러 장르로서는 드물게 스릴을 선사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이것이 장르적 결격 사유로 지적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가 특정 장르의 범주에 가둬질 수 없는 작가의 야망이 ‘창조’의 본질에 대한 묵시록적 비전으로 승화된 역작이라고 생각한다.

는 창조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영화는 ‘이중의 창조주’에 의해 조종되는 이야기다. 첫 번째 창조주는 프로메테우스호의 승무원들이 만나고자 안달하는 인류의 창조주 스페이스 자키이고, 두 번째 창조주는 데이비드로 대변되는 안드로이드를 창조한 웨이랜드사의 회장 피터 웨이랜드다. 는 이 두 창조주와 그들이 조형한 피조물의 관계를 통해 창조 행위의 배후에 도사린 욕망의 실체를 들춘다. 스페이스 자키와 피터 웨이랜드의 조우가 빚어낸 참사는 인류가 오랫동안 신앙해온 창조주의 선한 의지를 회의하게 만든다. 그들은 선의의 ‘아버지’들인가? 무성한 이야기들에 의해 가 과 비교선상에 놓일 수 있을지라도, 창조주의 자리에 서려는 망집이라는 이런 테마는 와 한 핏줄이다. 는 창조주에 대해 가지는 인간의 환상을 짓부수며, 창조 또는 생산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행위가 신비롭고 아름답기만 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자신이 잉태한 사악하고 불완전한 피조물을 살해한 엘리자베스의 결단은 차라리 현명하다.

가 묘사하는 공포는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계급적 위계가 야기한 실존적 위기다. 스콧의 세계관을 따르자면, 창조의 본질은 ‘지배’와 ‘군림’에 있다. 창조주는 순수하지 않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창조주와 피조물은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여실해졌을 때, 존재의 의미에서 동일 선상에 놓인다. 스콧은 피조물의 처지에서 바라본 불순한 창조주라는 관점을 통해 할리우드 주류 영화가 은연중에 피력하는 강력한 주체의 시선을 뒤집는다. ‘에일리언의 탄생’을 보여주는 묵시록적인 엔딩 역시 사악한 창조의 의지가 야기한 후과를 예고하고 있다(이 영화가 시리즈로 이어진다면 그 참담한 결과를 확인하게 되리라). 는 리들리 스콧의 고유한 주제라 할 수 있는, 주체의 가치에 관한 의문을 창조의 불가사의를 통해 풀어낸 흥미로운 괴담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호기심은 고양이만 죽인다

신화적인 SF는 언감생심, 새로운 상상력을 하나라도 더했으려나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기대를 품은 건 나지만 기대치를 높인 건 분명 의 제작사 쪽이다. 실제로 의 도입부는 기대가 터무니없는 게 아님을 확신하게 한다. 시원의 공간을 유려한 속도로 훑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매력적이어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문제는 이미지의 성찬이 잦아드는 다음부터 벌어진다. 나 와 비교해보자. 두 작품이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영원의 눈속임을 끝까지 유지하는 데 성공한 반면, 의 손은 팽팽한 끈을 도중에 놓아버린다. 리들리 스콧에게 예술가연하는 자의 인내 따위는 없다. 그는 어서 액션을 연출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한 할리우드 감독이다.

극의 중심에 선 두 인물인 과학자 엘리자베스와 안드로이드 데이비드가 공히 맞닥뜨리는 실패는 공교롭게도 영화의 실패를 암시한다. 고대의 그림과 기호를 창조자의 신호로 믿는 엘리자베스는 지시된 곳에 도달하면 그들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가 기나긴 항해 끝에 만난 존재는 보기를 염원했던 신과 다르다. 그녀가 느낀 실망 혹은 피곤은 그대로 내게 전이된다. 이후 그녀는 시리즈에서 리플리가 보여준 행동을 반복할 따름이다. 인물이 피 터지게 싸우고 탈출하고 다시 여정에 오를 동안, 전과 동일한 패턴으로 전개되는 영화는 지루함을 유발한다. 한편 데이비드는 외계 문화를 이해하는 방편으로 를 감상한다. 온몸으로 아랍 문화를 흡수하고 사막 지도자들과 연합한 로렌스조차 결국 한계에 봉착했으니, 외계 언어를 고작 두뇌로 습득했을 뿐인 데이비드가 외계인과 대면하자마자 머리를 뽑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데이비드가 어떤 말씀도 구하지 못하듯, 나 또한 영화에서 실낱같은 비전도 경험하지 못한다.

중·후반부에 이르면 ‘인류의 기원, 신의 존재’ 같은 주제는 자연스레 접게 된다. 신화적인 SF는 언감생심이다. 이 영화가 SF 장르에 새로운 상상력을 하나라도 더하기나 했단 말인가. 최소한 인간과 이종의 만남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견해 정도는 들려주어야 했지만, 외계인과 괴물을 여전히 외부의 적 이상도 이하도 아닌 수준으로 묘사하는 데 그친다. 영화의 결말부가 그럴싸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 건 못내 아쉽다. 는 단순한 궁금증을 남기고 끝난다. 질문은 철학을 낳지만, 호기심은 고양이만 죽인다. 그런 까닭에 결말부의 새 여정은 아득한 미래의 약속이라기보다 이어질 속편의 떡밥에 불과해 보인다.

이용철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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