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정보를 방송과 신문에서 얻는다. 특히, 방송이다. 음식 방송, 무지하게 많다. 교양정보부터 연예오락 프로그램까지 온통 먹는 것 얘기다. 음식 방송이 왜 이리 많은지 방송 제작자에게 물으면 대답은 한결같다. “일정한 시청률을 확보해준다.” ‘일정한 시청률’이란 음식 프로그램은 대충 만들어도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작가가 먹을거리 산지 정보를 파악하고 카메라 두어 대만 내려보내면 프로그램 하나가 뚝딱 나온다. 이때 사소한 경쟁이 벌어지는데, 타 방송사보다 먼저 그 먹을거리 영상을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신문도 대체로 비슷하다. 주로 화보 기사에 제철을 맞은 농·수·축산물이 자주 오르는데, 이때도 누가 먼저 그 사진을 게재하는지 경쟁한다.
미숙과를 들고 제철음식이라고?
먹을거리로 벌이는 시간 경쟁으로 인해 산지에서는 우습지도 않은 일이 발생한다. 서해에 찬 바닷물이 아직 나가지 않아 주꾸미 배를 띄울 처지도 아닌데 주꾸미 잡는 연출을 해야 한다. 그 방송을 보고 바다에 갔다가 휑한 찬바람만 맞고 올 수도 있다. 죽순은 분죽과 왕죽의 죽순이 생산량이 많고 맛있는데, 이보다 한 달 정도 이르게 나오는 맹종죽 죽순만 내내 방송에 나온다. 그래서 죽순 키우는 농민들은 방송이나 신문에 나가는 것도 반갑지 않다. 맛없는 맹종죽 죽순, 그것도 양이 많지 않은 그 죽순이 나올 때 소비자가 왕창 몰렸다가 정작 분죽과 왕죽의 죽순이 나올 때는 철 지난 줄 알고 찾지 않기 때문이다. 굴은 늦은 겨울과 이른 봄에 들어서야 살이 제대로 오른다. 그러나 방송은 늦은 가을이면 “굴 철이 돌아왔다”고 호들갑을 떤다. 매실은 장마 직전에야 익고 그 향이 짙어지는데, 새파란 미숙과를 들고 제철이라 방송한다. 그렇게 하여 매실 먹는 나라 중에 한국을 오직 청매만 먹는 이상한 나라로 만들었다.
방송과 신문이 앞서나가니 유통업체도 조급하게 호흡을 맞추어야 하고, 결국 생산자도 이 흐름에 따라야 한다. 그래서 남보다 먼저 생산하기 위한 경쟁이 붙었다. 초여름 제철 딸기는 잊힌 지 오래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봄 딸기 정도였는데, 요즘은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나와야 대접을 받는다. 한여름 과일인 참외와 늦여름 과일인 수박도 겨울이면 ‘첫물’이라고 시장에 깔린다. 가을의 포도, 사과, 배도 사정은 똑같다. 남보다 일찍 내야 주목받고 시장에서 팔리지, 조금 늦었다 하면 제대로 된 가격으로 팔 수 없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남보다 일찍 거두려면 온갖 술수를 쓸 수밖에 없다. 이때에 지베렐린이라는 성장촉진제가 더없이 유용하다. 특히 포도와 배에 많이 뿌린다. 지베렐린을 뿌리면 과일이 익는 것이 아니라 부피만 커진다. 이런 과일은 아무 향이 없다. 요즘 배가 물맛이 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과는 때깔만 내면 되는데, 이를 위해 과수원 바닥에 반사판을 깐다. 사과가 색깔은 빨간데 풋내가 풀풀 나고 고유의 향이 없는 까닭이다.
1960년대까지 한국인의 70%는 농어촌에 살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한국인은 ‘자연의 시간’을 알았다. 계절에 따라 어떤 먹을거리가 나오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 산업화로 인해 농어민과 그 자손은 도시로 나와 노동자가 되었다. 아침 9시에 출근해 저녁 6시에 퇴근하는 ‘자본의 시간’에 따라 살다 보니 자연의 시간을 잊었다. 신문쟁이도 방송쟁이도 도시의 노동자이기는 똑같다. 방송은 대충 만들어도 시청률이 나올 것이고, 신문은 제철 아닌 먹을거리 사진이 올라갔다고 따질 독자도 데스크도 없다.
배추밭에서 일어나는 일
먹을거리의 계절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무슨 큰 문제인가 할 수도 있다. 산업화는 거스를 수 없는 일이고, 그러니 그에 맞춰 살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먹을거리 생산과 소비는 경제행위이기도 한데, 이 먹을거리 생산과 소비에서 계절을 망각함으로써 발생하는 ‘경제적 사건’을 보면 대충 넘길 일이 분명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해마다 겪는 ‘배추 파동’이다. 배추는 원래 늦여름에 파종해 초겨울에 거두는 작물이다. 이 배추로 김장김치를 담가 먹는다. 그런데 지금은 사시사철 배추가 나온다. 겨울에는 비닐하우스에서, 여름에는 고랭지에서 배추를 키운다. 겨울 음식인 배추김치를 1년 내내 먹자고 억지로 키우다 보니 파동이 나는 것이다.
한국방송 <해피선데이-1박2일>에 나왔던 강원도의 고랭지 배추밭은, 누구의 눈에든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나 그 배추밭에서 일어나는 일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계절을 잊은 인간이 탐욕을 키우고 있는 밭일 뿐이다. 한여름의 햇빛과 장마를 버티게 하려고 뻣뻣한 잎의 내병성 품종을 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비만 오면 농약을 쳐대야 하는 반(反)자연의 농사가 그 아름다운 고원에서 이뤄지고 있다. 인간의 먹을거리는 자연에서 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고 사는 동안 먹을거리에는 인간의 탐욕밖에 남지 않게 된다.
황교익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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