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는 영리한 작품이다. 70대 노시인과 30대 소설가가 여고생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치정극이지만, 받아들일 만한 탐미적 로맨스로 형상화됐다. 게다가 젊음과 늙음에 대해 이보다 더 잘 표현한 영화가 어디 있으랴. 정지우 감독을 만나 영화에 관해 일문일답을 나눴다.
황진미(이하 황) 분장의 부담을 무릅쓰고, 노인 역할에 젊은 배우를 쓴 건 ‘노인의 몸속에 살아 있는 청년의 마음’을 표현하자면 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 같다.
정지우(이하 정) 맞다. 늙음에 대한 직접적 체험이 가능하려면 한 사람이어야 했다. 누군가 를 보고 “사람이 늙는구나가 아니라, 내 몸이 늙는구나가 느껴져 우울했다”고 말했는데, 칭찬처럼 들렸다. 에 보면 의 젊은 알파치노가 결혼하는 장면이 짧게 삽입돼 있다. 한 배우가 찍은 젊은 시절 장면이 같은 시리즈에 회상으로 나오는 것이다.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이 직접적인 감흥을 만들어낼 수 없다. 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내 생각은 그 감흥에서 유래됐다.
황 한 배우여야 하는데, 젊은 배우를 늙게 분장할 순 있어도, 늙은 배우를 젊게 분장할 순 없다. 그 점에서도 젊음은 비가역적이다. 그런데 박해일을 쓴 이유는 뭔가. 원작에는 더 강단 있는 인상으로 묘사됐던데.
정 강한 인상이었으면 은교가 노인을 무섭게 느끼지 않았을까. 은교가 노인에게 느끼는 감정이 믿어지려면 박해일의 얼굴에 담긴 해맑음, 귀여움, 짓궂음 등이 필요했다.
황 노인의 연정을 바라보는 우리의 이성과 감각은 이중적이다. 실제로 늙은 배우가 나왔으면 거부감이 컸을 것이다. 관객은 분장 속 박해일의 얼굴을 알기에, 노욕이라 욕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 영리하면서 살짝 비겁하단 느낌도 든다. 각색 역시 그렇다. 원작에선 은교가 서지우와 먼저 아는 사이 아닌가.
정 영화라는 매체는 표현의 폭이 좁다. 은교와 서지우의 관계가 앞에 나오면, 노인의 연정은 비웃음거리가 된다. 의 내용은 우리 사회에서 정말 예민한 것이 아닌가. 그만큼 아슬아슬한 균형잡기가 중요했다. 가령 서재에서의 정사 장면도 서지우의 행동이 조금만 더 격했다면 그건 ‘데이트 강간’이 되고, 목격한 노시인이 구출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황 동감한다. 영화 소개에 ‘여고생과의 로맨스’가 나오고, 예고편은 더 자극적으로 찍혔다. 선정성을 우려하거나 기대한 관객도 많을 텐데, 영화는 살짝 시치미를 떼며 따돌린다. 노시인은 상상했을 뿐이고 예술로 승화시켰는데, 펄펄 뛰는 서지우의 ‘오버질’을 보여주며, 영화가 관객에게 “뭘 상상했는데?”라고 오히려 반문하는 듯하다. 영리한 각색인데, 서지우의 캐릭터가 축소되고 거칠게 그려진 건 불만이다. 그냥 찌질한 놈 아닌가.
정 그렇지 않다. 성격의 다면성이 줄어든 건 맞지만, 그에게서 순진한 소년의 이미지를 발견하고 인간적으로 연민하거나 감정이입하는 사람도 많다.
황 교통사고 장면이 인상적이다. 멀리서 잡을 수도 있었을 텐데,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길게 찍은 이유가 뭔가.
정 거짓된 삶에 대한 응징이랄까, 자업자득이랄까. 벌을 받는 마지막 순간의 얼굴을 생략하거나 압축하지 않고 끝까지 리얼타임으로 드러내는 게 도덕적 균형감이라 생각했다.
황 원작에선 두 남자의 눈에 비친 대상이던 은교가 영화에선 생생히 살아난다. 그 결과 원작에선 필요 없던 은교의 의도가 영화에선 중요해진다. 서지우와의 정사 동기로 “내가 그렇게 예쁜 아이인 줄 몰랐다”는 말, “외로워서”란 말이 나오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지 않나.
정 여고생의 위태로운 성장담으로 봐주었으면 좋겠다. 청춘의 혼란을 느끼는 시기고, 은교는 자기를 인식하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경험하며 성장한 것이다. 마지막의 각성 장면도 그런 의미고. 젊은이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성장하지만, 늙은이는 둘 다 죽지 않나. 그러니 청춘이 값진 것이지.
황 은교 역할의 김고은은 요즘 유행하는 얼굴이 아니다. 이전에 전도연은 섹시한 이미지가 없었다. 의 정유미도 배우 할 인상처럼 보이지 않았다. 셋 다 언뜻 보면 평범한데 자세히 보면 예쁘다는 공통점이 있다. 감독의 혜안인가, 아님 취향인가.
정 너무 예쁜 얼굴은 배우로서 표현의 폭이 적다. 김고은은 평범한 느낌이지만, 어떤 감정이 들 때 대단히 직접적인 표정과 눈빛이 나온다.
황 전부 치정과 질투가 난무하지만, 당사자들의 처지에서 이해할 수 있게 그렸다. 통속적 욕망에 대한 ‘내재적 접근법’이랄까.
정 ‘내재적 접근법’이란 표현이 재밌다. 그런 욕망이 다 우리 내부에 있는 것이니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황 1968년생인데, 늙음에 대해 진짜 공감하는 것 같다. 계기가 있는가.
정 노안이 왔다. 글자를 보려고 손을 멀리하거나,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는 나에게서 노인의 몸짓을 발견하고 당황했다. 영화감독에게 안 보인다는 건 큰 공포다. 늙는다는 건 진짜 억울하고 화나는 일이다.
글 황진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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