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의 인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첫사랑’은 언제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말이다. 왜 그럴까? 과거에 속하기 때문에 이른바 ‘기억의 이상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일까? 과거의 경험이 사후 구성의 산물인 것처럼, 결국 남겨진 경험은 아픈 것을 모두 감산한 감미로운 것뿐일지 모른다. 정녕 첫사랑은 이렇게 좋고 예쁜 것만을 모아놓은 종합선물세트인 것 같다.
첫사랑, 타자를 발견하는 사건
영화가 재현하는 첫사랑의 기억에 반감을 표하는 이들은 사랑의 아픔을 아는 이들일 것이다. 이들에게 사랑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기억의 서랍장에 넣어놓을 수 없다. 끊임없이 끄집어내서 어루만지고 닦아야 한다. 그러나 일상을 살아가는 장삼이사 대부분에게 첫사랑은 아련한 추억일 뿐이다. 첫사랑과 ‘아련한 추억’이라는 말만큼 더 어울리는 조합이 없는 것처럼, 현실에서 첫사랑은 과거의 시간에 속한다.
과연 첫사랑은 무엇인가? ‘애정남’처럼 한마디로 정의 내리자면, 첫사랑은 바로 타자를 발견하는 사건이다. 자아가 만들어지기 위해 필요한 절차가 바로 첫사랑이다. 흥미롭게도 첫사랑은 언제나 성차(gender)에서 출발한다. 생애 최초로 나와 완전히 다른 성(sex)을 발견하는 순간이 바로 첫사랑이다. 어제까지 등굣길에 아무 생각 없이 보았던 여학생이 갑자기 ‘여자-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첫사랑의 경험이다.
여드름 풍성한 얼굴로 게임기나 붙잡고 앉아 있던 ‘소년·소녀’들이 갑자기 머릿결에 신경 쓰고 옷차림에 예민해지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첫사랑이라는 사건에서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때부터 아이는 부모의 영향권을 벗어나서,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가족의 테두리를 넘어서서 다른 공간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우리 모두는 이 과정을 거쳐서 어른이 되었다. 물론 어른이 되는 순간, 우리는 이렇게 통과한 ‘헬게이트’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리겠지만, 그래서 부지불식간에 찾아드는 같은 영화의 한 자락을 통해 그 기억의 한 조각을 떠올리게 되지만, 여하튼 우리 모두는 결국 첫사랑을 가졌다.
| |
자기를 주장하는 민주주의의 출현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첫사랑은 성차라는 근본적 차이 위에 놓여 있다는 진실이다. 말하자면, ‘나’라고 불리는 이 자아는 서로 다른 성에 자신을 비춰보는 분열된 상이다. 신비로울 정도로 기이한 이 경험은 안온했던 가족관계로부터 자신을 분리해내는 불안한 과정이기도 하다. 조앤 K. 롤링이 쓴 시리즈는 이런 감정을 판타지라는 익숙한 장르에 녹여넣은 덕에 단순한 10대 소설의 범위를 훌쩍 넘어서서 어른도 읽는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
를 읽는 어른들이 이 판타지 소설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원초적 장면이었을 것이다. 이 장면은 설명할 수 없는 내면의 욕망이 무시무시한 힘으로 유년의 장막을 찢으며 솟아오르는 스펙터클이다. 헤르만 헤세의 는 이런 첫사랑의 발견을 동성애 코드로 보여준다. 남성의 첫사랑이 굳이 ‘여성’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 여기에서 밝혀진다. 문제는 첫사랑의 발견이 기존 질서를 비집고 들어오는 불편한 경험을 동반한다는 것.
첫사랑은 때로 불편하다. 언제나 사랑은 쾌락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쾌락이 있어야 불쾌감도 있다. 우리는 쾌락을 금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첫사랑을 통해 배운다. 원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첫사랑에게서 깨닫는다. 처음으로 입맛을 잃고, 웃음을 빼앗긴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보고 싶은 그 사랑의 얼굴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살기 위해’ 첫사랑에 대한 열망을 통제하려고 한다. 살고 싶은 욕구와 사랑의 욕망이 서로 충돌하는 것이다. 이 충돌은 부모와 가족이라는 안락한 세계에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자아를 주장하는 경험을 초래한다. 이렇듯, 첫사랑은 자기를 처음으로 주장하는 민주주의의 출현이기도 하다.
독일 낭만주의자들이 왜 사랑을 개인의 출현으로 이해했는지 이 사실에서 명확하게 밝혀진다. 사랑의 일상이야말로 근대 세계에서 지배적인 삶의 양식이었던 것이다. 결혼보다 사랑을 앞세웠던 세계관이 등장함으로써 근대적인 자아는 첫사랑의 경험과 일치하게 되었다.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고도 사랑한다면 같이 살 수 있다는 생각은, 그러므로 포기할 수 없는 근대의 윤리인 셈이다.
첫사랑이 ‘첫경험’을 의미하진 않아
나에게 첫사랑은 ‘색채’였다. 가랑비가 내리던 초여름날, 멀리서 걸어오던 노란 원피스가 내 첫사랑의 기억이다. 아직도 그 기억은 또렷하고, 생생한 느낌은 여전하다. 그때 이기적이기만 했던 내 마음은 노란 태양빛 같은 그에게 활짝 열려 있었다. 이타심이라는 이질적인 생물이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다. 노곤한 잠마저 쫓아버린 그 경험은 나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놓은 사건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나를 희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열망을 넘어선 어떤 정신적인 측면이었다. ‘빨간 책’ 따위에서 얻을 수 없던 다른 차원이 거기에 있었다. 그러므로 첫사랑은 ‘첫경험’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이에 상관없이 첫사랑이 찾아올 수 있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첫사랑은 더더욱 ‘마지막 섹스의 추억’과 다른 것이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윤석열, 소맥 넘칠 듯 따라 20잔씩 새벽까지 폭주”
연차 1개만 쓰면 9일 연휴?…1월27일 임시공휴일 지정 검토
윤석열 체포 2차 시도 초읽기…”마지막이라는 비장한 각오”
인해전술·헬기·확성기…전현직 경찰이 꼽은 ‘윤석열 체포 꿀팁’
“사탄 쫓는 등불 같았다”...‘아미밤’ 들고 화장실로 시민 이끈 신부
법원행정처장 “영장에 쓰인 ‘형소법 110조 예외’, 주류 견해 따른 것”
교통 체증 고려않고 덜컥 시작…울산시 아산로 공사 나흘 만에 중단
홍준표 대구시장, 내란선전죄·정치자금법 위반 혐의 고발 당해
‘관저 김건희 개 산책 사진’ 어디서 찍었나…“남산에서 보인다길래”
윤석열 체포영장 재발부…“경찰 대거 투입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