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에 드라마 속 한 장면이 흐르고 있다. 며느리인 듯 보이는 여성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고, 기세등등한 시어머니는 그녀에게 ‘너 같은 애가 어쩌다 우리 집에 들어와서’ 유의 대사를 날리며 컵 속의 물을 끼얹는다. (한국방송 토·일 저녁 7시55분·이하 )에서 제작PD로 일하는 차윤희(김남주)의 회사가 만든 드라마 속 풍경이다. 같이 텔레비전을 보던 남편이 “자기네 회사에선 왜 만날 막장 드라마만” 만드느냐고 묻자 윤희는 대답한다. “저렇게 시어머니가 물벼락 정돈 날려줘야 시청률이 나오는데 어떡해. 현실이 딱 저런 거지.”
도발적 문제의식과 대중적 코드의 조화
이 극중극 장면은 고부 갈등과 주부 수난기를 주 테마로 삼아온 기존 가족극 세계를 풍자하는 동시에 그것이 재생산하는 가부장제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한 세계의 대표적 사례인 한국방송 주말 가족극사에서 의 이러한 문제제기는 매우 도발적인 것이다. 이 작품은 시댁 걱정 없는 ‘능력 있는 고아’가 이상형이던 윤희가 그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남자 테리(유준상)를 만나 결혼했으나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의 친부모가 나타나 꼼짝없이 ‘시월드’에 입성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더구나 그 ‘시월드’는 1992~1993년 방영한 문화방송 드라마 에서 튀어나온 듯한 전통적인 남성 중심 대가족이다. 시할머니에 시부모, 시삼촌, 시이모, 시누이 셋까지 구색도 완벽하다.
윤희 처지에선 멜로물이던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하루아침에 하드코어 호러물로, 인생의 장르가 바뀌는 순간이다. 원수 같던 이웃이 알고 보니 시댁이라는 이 아이러니한 설정은 에 중요한 희극적 틀을 제공한다. 하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 보면 결혼과 함께 여성에게 강요되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의 반영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윤희의 상황은 단지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했을 뿐인데 이전까지 완벽한 타인이던 시댁의 일원으로 하루아침에 편입되어야 하는 기혼여성들의 현실과 다르지 않으며, 이러한 관습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것인지를 환기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설정은 이전까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봉합해온 여러 갈등을 처음부터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윤희는 시어머니가 될 청애(윤여정)와 이웃지간으로 먼저 만났기에 ‘잘 보일 필요 없이’ 본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고, 따라서 둘의 갈등은 고부관계를 넘어 인간 대 인간, 여성 대 여성의 갈등으로 구체화될 수 있었다. 즉 은 둘의 대립을 신세대와 구세대,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 커리어우먼과 전업주부 등 다양한 측면에서 그려낸다. 그런 둘이 마침내 고부지간으로 만났다. 이 작품이 이야기하는 가족의 탄생이란 그렇게 결혼제도에 잠재된 불편함을 문제적으로 드러내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전통적 가족극 이데올로기에 반기를 든 은 그러면서도 대중적 코드를 조화롭게 구사한 덕분에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출생의 비밀, 불륜, 이혼녀와 연하남 로맨스 같은 통속적 장치와 비밀을 감추는 양실(나영희)처럼 극의 갈등을 지연시키는 관습적 인물 등이 기존 가족극의 보수적 시청자를 무리 없이 끌어들인다. 캐릭터의 힘도 크다. 가족극은 미니시리즈처럼 밀도 높은 서사가 아니라 긴 호흡의 일상적 이야기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캐릭터 운신의 폭이 중요한 장르다. 예컨대 가족극 최고의 시청률 제조기 문영남의 드라마들은 선정적인 ‘막장’ 코드도 있지만 캐릭터쇼가 주는 재미가 상당하다. 엄청난, 왕재수, 도우미 등 이름에서부터 특성이 부각되고 인간의 속물적 본성을 여과 없이 비추는 인물들의 충돌이 빚어내는 코미디가 안겨주는 재미다.
며느리기 길들이기식의 결말 극복할까
에도 문영남 작가 드라마 못지않게 개성적 인물들의 배치와 조합이 자아내는 캐릭터쇼의 재미가 있다. 다혈질 윤희는 예민한 청애만이 아니라 시댁 구성원 그 누구와 맞붙어도 해프닝을 벌이게 된다. 윤희의 철없는 친정 엄마 한만희(김영란)와 교사 직업병 며느리 지영(진경)의 대립 구도, 중성적인 이숙(조윤희)과 허당 마초 재용(이희준)의 러브라인, ‘갱년기 시스터스’ 청애, 보애(유지인), 순애(양희경)의 중년여성 조합 등 다양한 인물 구도가 시트콤 못지않은 웃음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윤희의 직업인 드라마 제작 현실을 비추며 기존 드라마의 클리셰를 변주하는 재미가 더해진다. 가령 계단 청소 에피소드에서 늦잠을 자고 나오던 윤희가 청애에게 물벼락을 맞는 해프닝은 첫 회의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물을 뿌리는 극중극 장면을 코믹하게 변주한 것이다. 웃기려고 이런 코미디 장면들을 넣은 것만은 아닌 듯하다. 주말 드라마가 막장 드라마를 풍자하며 드라마 자체에 대한 자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동안 며느리의 반란을 시도한 몇몇 가족극이 결국엔 며느리 길들이기로 끝난 한계를 은 극복하리라는 기대를 갖게 만든다. 출생의 비밀은 밝혀졌다. 며느리계의 이단아이자 처세술의 달인 윤희는 과연 ‘시월드’에서 어떠한 생존의 해법을 제시할 것인가.
김선영 드라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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