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방송 시트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의 장면 곳곳은 문화적 패러디와 풍자로 가득 차 있다. 키우던 연예인에게 배신당한 기획사의 대표(가운데)가 술 마시는 장면은 예수의 ‘최후의 만찬’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렇게 웃어젖힌 것은 ‘코드’ 때문이다. 2월4일부터 문화방송 에브리원 채널에서 방송을 시작한 시트콤 는 어떤 코드 맞는 겨드랑이와 발바닥들을 사정없이 간지럽히는 시트콤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다른 사람도 나처럼 채신머리없이 깔깔거렸을라나? 이런 웃음 코드에 맞는 사람은 누구?
코드명은 ‘귀여움’
“역사는 승리한 자의 이야기를 하고, 소설은 위대한 패배자들을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할 수 없이 스스로를 구하려는 자영업자들의 이야기를 한다.” 시트콤은 우선 자영업자들의 발바닥을 노렸나 보다. 물론 가겟세 또박또박 내고 분점 계획하는 잘나가는 자영업자 말고 “사업을 하려면 강남이라는 프리미어리그에는 들어가야겠는데 도저히 돈이 안 되니까 분데스리가 같은 분당에 오려다가 그마저 여의치 않아 성남의, 그것도 컨테이너 박스에 들어앉아야 하는” 사람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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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한 연예기획사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한다. 화려한 연예계라지만 쥐꼬리만 한 연예기획사라 위화감과는 거리가 멀다. 기획사 대표 구희본은 심혈을 다해 키운 윤박이 다른 회사로 스카우트되자 정신줄을 놓는다. 남은 지망생들과 미련 없이 헤어져야 할 판이다. 그런데 그날 하필 김성령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무슨 추태로 그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김성령이 매니저 계약을 하겠다고 나왔다. 대출광고 찍는 연예인들에다 온갖 치사스러운 거래가 지배하는 곳이다. 는 화장 벗겨진 연예계의 얼굴을 다루지만 그 ‘생얼’, 뜻밖에도 귀엽다. 미스코리아, 그것도 미가 아닌 진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여배우 김성령은 제멋대로고 까탈스럽지만 알고 보면 순진한 사람이다. 구희본은 직원에게 퇴직금 대신 ‘파일 다운로드 공짜’ 쿠폰을 찔러줄 만큼 뻔뻔하지만 “당신은 대출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광고 노래로부터 소속 연예인을 구해야겠다는 사명감 정도는 갖고 있다. 쉽게 발끈하고 등 돌리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애초부터 공격성이라고는 없는 순하고 귀여운 등장인물들이 대부분이다. 말하자면 이 시트콤의 코드는 ‘귀여움’이다.
시트콤을 만든 윤성호 감독은 “나이는 먹는데 살 방편이 많지 않은 약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무기는 귀여움밖에 없다”며 의도를 명확히 했다. “우리나라 남자들은 귀여운 척해야 하는데 인지부조화를 일으켜서 센 척, 강한 척 하다가 민폐를 일으킨다. 한국 남자들, 귀여워져야 한다”고도 당부한다. 아닌 게 아니라 에는 조폭 출신이지만 쉽게 설득당하는 광고기획사 사장, 사랑에 빠지면 얼굴이 발그레해지는 PD 등 귀여운 남자들이 가득하다.
의 시작은 원래 인터넷이었다. 윤성호 감독은 2010년 5월부터 단편 시트콤 10편을 인터넷으로 ‘방출’했다. 찌질한 20대 청춘 군상들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의 존재감은 컸다. 공짜로 풀린 ‘독립시트콤’이라는 ‘듣보잡’ 장르면서도 김정화, 공효진(목소리 연기) 같은 배우들이 출연한데다 진중권, 김조광수 감독 등 매회 카메오들이 줄을 이었다. 끝까지 극적인 사건 하나 없이 그저 잉여 같은 인물들의 에피소드만으로 극을 끌고 나가는 것도 그렇지만, 동성애라든가 정체성 해리장애라든가 낯설어서 심각해지는 코드를 엮어 가볍게 웃기고 쉽게 울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방송용으로 시즌2를 만들자는 기획안을 내놓은 문화방송 에브리원 채널의 한백교 프로듀서는 “편성은 모험이었지만 신선한 콘텐츠가 케이블 채널의 생명인데 이 시트콤은 그런 걸 갖고 있었다. 청춘들의 이야기를 재밌게 풀면서 그 현실의 핵심에 접근하는 부분이 있었다”고 했다. 그 핵심은 아마 한 프로듀서가 말했듯 “정치적이고 날카로운 풍자가 작품에 잘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넷에서 케이블 채널로 진출한 는 인터넷의 직설 자세를 유지할 수 있을까? 윤 감독은 “정치적 어휘가 과한 것도 싫고 아예 배제된 것도 싫다. 술자리에서 술 마시며 섞거나 동네 반상회를 하면서 나누는 딱 그 정도가 좋다”고 했다.
‘듣보잡’ 시트콤, 변방의 존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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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판의 장점은 감칠맛 나는 사랑 이야기였다. 텔레비전으로 오면서 좀더 현실적인 먹고사는 이야기를 하려고 주인공들의 나이는 5살 정도 올라갔고, 사랑 얘기도 크게 줄어든 듯하다. 윤 감독은 “러브라인이나 삼각구도 같은 이야기가 갖는 효용은 알겠는데 사랑 얘기는 본격적으로 하지 않겠다. 시트콤의 생명인 풍자나 해학성이 약해질 우려가 있어서”라고 했다. 독립영화 정신으로 만든 이 시트콤에는 인위적인 웃음소리 효과조차 나오지 않는다. 대신 기독교, 해병대, 남자들의 일방적인 판타지 등 수다한 사회적 코드를 가볍게 콕콕 찔러댄다. 스타는 없는 대신 카메오는 넘쳐난다. 변영주·이해영 같은 영화감독이나 아이돌 그룹, 인디밴드 멤버에다 허지웅 같은 논객까지 방송에서 보기 어려운 캐릭터들이다.
는 8회 방송을 남겨두고 있다. 태생부터 낯선 이 독립시트콤이 지닌 “누군가는 서사의 기운을 받아서 혁명의 입맞춤을 나누길” 바라는 소망은 방송에서도 통할까? 예상 가능한 운명은 가난한 주머니와 풍부한 입담을 오가며 좌충우돌에다 가끔 존재가 분열하면서 갈 길을 찾으리라는 것이다. 인터넷판 ‘구하라’의 말을 빌린다면 “맨날 이 지랄. 그렇지만 우리 존재 파이팅”이란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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