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할 수 있다, 차례상

아내와 함께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결혼 4년차 송호균 기자가 밝히는 딱 하루치 노동으로 가능한 차례상 차리기 노하우
등록 2012-01-20 12:13 수정 2020-05-03 04:26
차례상 차리기는 여러모로 심리적·물리적 진입장벽이 높다. 하지만 형편에 맞게,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면 된다. 차례상 차리기를 피할 수 없다면 우선 남자들부터 명절 화투판과 키보드 앞을 떠나고 볼 일이다. <한겨레> 김정효

차례상 차리기는 여러모로 심리적·물리적 진입장벽이 높다. 하지만 형편에 맞게,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면 된다. 차례상 차리기를 피할 수 없다면 우선 남자들부터 명절 화투판과 키보드 앞을 떠나고 볼 일이다. <한겨레> 김정효

설날이 다가온다. 어떤 사람에게는 민족의 명절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노동 주간이다. 가족 중 누구 하나에게만 짐을 지우는 전통이 달갑지 않다면, 그래서 조상의 음덕을 기리고 가족의 무탈을 기원하려고 준비하는 차례상이 점점 부담이 되어가고 있다면, 나서는 수밖에 없다. 할 수 있다, 부부가 함께 차리는 차례상이다.

결혼 4년차인 기자는 결혼 첫해부터 아내와 함께 차례상을 준비해왔다. 부모님댁에 며느리가 가서 도와야 하는 상황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먼저 밝혀둔다. 사정을 이해하고 동의해준 아내에게 고맙지만, 아내 처지에서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남편과 함께 차례상을 준비하는 게 부담이 덜하리라.

“언젠간 우리 집에서도 차례상을 차려야 할 텐데,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한 선배 기자의 말처럼 차례상 차리기는 심리적·물리적 진입장벽이 높은 일이다. 하지만 형편에 맞게,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면 된다. 큰 덩어리는 나물과 전, 그리고 생선구이다. 정석대로라면 어탕과 육탕, 소탕을 따로 끓여내는 게 옳지만 쇠고기무국 하나로 대신하기로 했다. 산적 대신 상대적으로 만들기 쉬운 불고기나 너비아니를 올려도 된다. 설에는 떡국, 추석에는 토란국을 끓인다. 여기에 과일과 포, 한과와 떡 등을 준비하면 그럴듯한 차례상이 완성된다.

부부가 함께 마시고 차리고

사실 차례상은 딱 하루치의 노동으로도 가능하다. 명절 전날 오전에 장을 보고, 오후에는 음식을 준비한다. 나물과 채소 등은 근처 생활협동조합(생협)에서 구입한다. 물가가 워낙 올라서 마트보다는 생협이 오히려 저렴하고, 품질도 믿을 만하다. 벌레가 먹지 못하는 음식은 사람도 먹을 수 없다는 주의인지라, 이상할 정도로 생생한 마트 물건보다는 생협을 선호한다. 생협에서는 냉장육을 취급하지 않기 때문에 고기는 주로 재래시장에서 산다. 명절노동에 힘이 될 막걸리도 빠질 수 없다. 첫해에는 나물과 전을 다섯 가지씩 준비했다가 그다음 명절부터 세 가지로 줄였다. 나물은 기자가, 전은 아내가 담당한다. 아내는 이미 텔레비전 앞에 신문지를 깔아놓았다. 우선 막걸리부터 한 사발 들이켠다. 아무렴, ‘즐거운 노동’이라는 형용모순은 술기운으로만 가능하지 않던가.

여러 가지 나물을 한꺼번에 한다고 시간이 곱절로 드는 것은 아니다. 양념을 넉넉히 해두면 준비가 쉽다. 마늘과 파를 충분히 다지고, 소금과 들기름, 간장, 깨 등을 늘어놓는다. 나물은 고사리, 시금치, 숙주다. 말린 고사리는 전날부터 불려두는데, 그때 불린 물을 그대로 넣고 충분히 삶아 깊은 맛을 내는 게 핵심이다. 나머지 나물은 숨이 죽을 정도로만 살짝 데쳐야 아삭아삭한 식감을 살릴 수 있다. 삶은 고사리는 들기름에 볶아내고, 시금치와 숙주는 순서대로 기본 양념에 무치면 된다. 세 가지 나물을 완성하는 데 1시간이면 충분하다. 원래 제사나 차례 음식에는 귀신을 쫓는다 해서 마늘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조상님뿐 아니라 자손도 먹고 살아야 하니 마늘향 정도는 이해해주시리라 믿어본다.

그동안 아내는 본격적으로 전을 부치고 있다. 전은 나물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올해는 생선과 고기, 버섯을 하기로 했다. 재료에 우선 밑간을 해두고, 밀가루와 달걀물을 입혀 하나씩 지져낸다. 아내는 달걀물을 한 번 걸러 쓴다. 알끈을 제거해야 정갈한 완성품이 나온단다. 모양이 그럴듯한 놈은 채반에 올려 식히고, 실패작들은 술안주가 된다. 아내가 전을 부치는 동안 주방을 정리한다. 설거지를 쌓아두면 오히려 일이 꼬인다는 것을 경험에서 배웠다. 대충 정리를 마치면 생선구이를 준비한다. 도미와 병어, 조기가 기본 품목이다. 생선을 쪄내는 집이 많지만, 번거로워서 오븐에 굽는다. 어쩌다 고구마를 구워 먹을 때나 쓰일까, 부엌 한쪽에서 잠만 자던 오븐이 쓸모를 찾는 몇 안 되는 순간이다. 팬에 올리브 오일을 넉넉하게 두르고, 비늘과 아가미를 제거한 생선에 소금과 레몬즙을 뿌려 구워내면 된다.

명절 전야는 깊어가고

생선이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며 빈 막걸리통도 늘어난다. 아내도 기자도 눈이 살살 풀렸다. 채반에 올라오는 전의 모양이 삐뚤어지기 시작한다. 제사는 정성이라는데, 부부의 초심이 흔들리는 게 보인다. 나머지는 그냥 잡일이다. 국거리를 준비하고, 양념장에 너비아니용 부챗살을 재워두고, 밤을 친다. 아내가 국을 끓이는 동안 제기를 꺼내 마른 행주로 닦는다. 떡국은 명절 아침에 끓이면 된다. 아침부터 밥 대신 막걸리로 배를 채워온 아내는 슬슬 방언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주종을 맥주로 바꿀 타이밍이 됐다.

차례상에 음식을 올리는 진설(陳設)과 차례의 순서 등은 언급하지 않도록 하자. 홍동백서, 조율이시, 어동육서, 두동미서, 좌포우혜 등의 원칙은 동일하지만 집안마다 워낙 ‘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남의 집 제사에 ‘진설의 법도’를 운운하며 참견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본가의 차례라면 본가, 처가에선 처가의 ‘법도’를 충실히 따르면 그만이다.

차례상은 조상님 은공으로 저절로 차려지는 게 아니더라. 명절은 무엇보다 옆 사람의 안녕을 기원하는 날이 아닌가. 차례상을 차려야만 한다면, 피할 수 없다면? 남자들이여, 지금부터라도 화투판과 키보드 대신 도마와 칼을 잡아보는 건 어떤지.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