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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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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카, 이 사람도 잡아가실겁니까?

도시를 돌며 풍자화 붙이는 퍼포먼스 벌이며 메시지 전하는 예술가 이하씨… 돈의 계급 아닌 영혼의 계급으로 줄 세우다
등록 2012-01-14 11:36 수정 2020-05-03 04:26
지난 1월3일 낮 서울 종로2가의 버스 정류장에서 자신의 작품 <노무현의 눈물>앞에 선 이하 작가. <한겨레21> 박승화

지난 1월3일 낮 서울 종로2가의 버스 정류장에서 자신의 작품 <노무현의 눈물>앞에 선 이하 작가. <한겨레21> 박승화

지난해 12월8일 새벽 1시, 한 사내가 꾸러미를 들고 서울 종로에 나타났다. 꾸러미는 나치 군복을 입은 이명박 대통령의 풍자화 50여 장이었다. ‘삽자루 넥타이’와 ‘G완장’으로 무장한 이명박 대통령은 환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 있었다. 입가에선 침이 흘러내렸다. 이하(본명 이병하) 작가는 이 작품들을 인사동과 광화문, 청계천 일대에 설치했다. “어머어머, 이명박이다.” “어떡해, 귀엽네.” 당장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환호성을 지르는 취객도, 스마트폰을 들고 사진을 찍어가는 시민도 있었다. 이 그림은 곧바로 인터넷을 통해 퍼졌다. 그는 “재미있는 것은 설치된 작품을 보고 아무도 ‘이명박 대통령’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모두 별명을 부르더라. ‘가카’께서 얼마나 불충한 국민을 두고 있는지 느낌이 확 왔다”고 했다.

일주일 뒤 새벽, 이번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북한 김일성 주석의 그림을 같은 장소에 설치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기 전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김일성 주석이나 독재자인 것은 마찬가지인데, 그 자손이 각각 남북한에서 정치의 중심에 서 있는 상황을 풍자하고 싶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는데 지나가던 어떤 분이 바로 찢어버리더군요. 그래서 해프닝으로 끝났습니다.”

지난해 12월 서울 종로 일대에 50여 점이 설치돼 화제를 불렀던 이하의 이명박 대통령 풍자화.

지난해 12월 서울 종로 일대에 50여 점이 설치돼 화제를 불렀던 이하의 이명박 대통령 풍자화.

귀여워할 수 없는 독재자들

지난 1월3일 낮, 그가 다시 종로2가 버스 정류장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눈물을 흘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얼굴이 담긴 그림을 붙였다. 앞선 작품들이 담고 있는 풍자의 기운은 쏙 뺐다. 침을 흘리는 현직 대통령과,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전직 대통령의 눈물은 생경할 정도로 대조적이었다. 분주하게 정류장을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이 잠시 노 전 대통령의 얼굴에 머물다 떠나갔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는 이하 작가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대학에서는 회화를, 대학원에서는 조각을 전공했다. 시사만화와 애니메이션 일도 했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박재동 화백의 소개로 ‘만화초대석’에서 만평 작가로 일하기도 했다. 영화를 전공하려고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다시 회화로 전향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초까지 서울 동교동 ‘도어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서는, 각국의 독재자와 권력자를 포함해 역사적 인물을 그린 작품 38점을 모았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문제의 ‘이명박 대통령 그림’이 포함된 ‘귀여운 독재자(Pretty Dictator) 시리즈’였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오사마 빈라덴, 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국가원수,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등이 등장했다. 그는 “이런 인물들을 최대한 이쁘게, 귀엽게 그려내려 했다”고 말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머리에 붉은 리본을 달았다. 빈라덴은 어린 양을 안고 있는 예수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는 금속으로 된 신체를 살짝 드러낸 터미네이터로 표현했다.

이하 작가는 “‘귀여운 독재자’라는 말 자체가 형용모순”이라며 “독재자가 어떻게 귀여울 수 있겠나. 작품을 통해 각국 독재자들의 존재에 근본적 의문을 던지는 한편, 그들을 조롱하고 싶었다”고 했다. “미국에서 ‘귀여운 독재자’ 전시를 여는 날 빈라덴이 죽었어요. 이후에 카다피가 죽었고,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권좌에서 밀려났어요. 최근에는 김정일 위원장도 죽었죠. 동료들은 ‘네가 작품만 만들면 왜 사람들이 죽거나 쫓겨나느냐’라고 하더군요. 사실 지금 어떤 분의 안위가 굉장히 걱정됩니다. (웃음)” 이와 함께 ‘역사의 인물 시리즈’에는 박정희·김일성·김대중 등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정치 지도자와 축구선수 박지성, 피겨여왕 김연아, 팀 등 한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함께 담겼다.

논란도 적지 않다. 작가의 의도와 작품을 통해 드러내는 정치적 메시지가 ‘지나치게’ 분명한 탓이다. 선과 악의 선명한 대립 구도야말로 현대미술의 흐름에서 볼 때 ‘구닥다리’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예술가가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숨겨야 한다는 주장이 오히려 이해되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사람에게 정치적 식견은 가장 기본적인 게 아니냐. 이게 없다면 예술가가 아니다”라고 했다. “물론 이해는 합니다.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죠. 예술가들이 그런 두려움을 갖는 게 권력이 노리는 점이고, 이 사회의 비극적인 시스템이에요. 하지만 예술가들은 두려워해선 안 됩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축복받은 존재인 예술가들이 그런 시스템에 도전하며 적극적으로 발언해야 합니다.”

“MB는 20년 동안 다룰만한 정치가”

이하 작가는 ‘귀여운 독재자’라는 형용모순을 통해 그들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겠다는 시도를 했다.

이하 작가는 ‘귀여운 독재자’라는 형용모순을 통해 그들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겠다는 시도를 했다.

그가 이날 종로에 설치한 은 새로 시작될 ‘눈물 시리즈’의 시작점이다. 마하트마 간디, 테레사 수녀,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마틴 루서 킹 목사, 배우 오드리 헵번 등이 시리즈를 장식할 주인공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눈물 한 방울을 흘리는 모습으로 묘사될 예정이다. 국내 인물로는 노무현 전 대통령 외에 문익환 목사,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한진중공업의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최근 세상을 등진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등이 등장한다. “사실 사람들을 구분하는 계급은 돈 아닌가요. 이명박 대통령도 ‘돈의 계급’으로 보면 대단히 성공한 분입니다. 반대로 저는 ‘영혼의 계급’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영혼의 수준으로 사람들이 평가받는 세상, 탐욕이 아니라 따뜻한 시선을 가진 사람들이 잘사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을 풍자한 새로운 작품이 또 한 번 거리에 등장할 수도 있다. 그는 “아직 공개하지 않았지만, 이 대통령은 앞으로 20년 동안 계속 다룰 만한 정치가”라고 했다.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작품을 들고 거리로 나가겠다”는 그는, “정치 때문에 시민들이 받는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풀어주는 것 또한 예술가의 소명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혹시 그는 지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때 ‘쥐그림 퍼포먼스’로 대법원에서 벌금 200만원의 확정판결을 받은 대학강사 박정수씨의 뒤를 잇는 게 아닐까. 박정수씨 사건을 보며 이 대통령의 풍자화를 거리에 설치하겠다고 마음먹었다는 이하 작가는, “예술가의 표현의 자유를 법으로 억압한다는 건 ‘콧구멍 벌렁거리게 웃기는 일’“이라며 “전혀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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