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한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해 본편으로 유인하라.’ 세상의 모든 예고편이 떠안은 임무다. 출판사의 책 홍보 수단으로 서서히 자리잡아가는 북트레일러도 그 임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북트레일러는 예고편(Trailer)과 책(Book)의 합성어로, 책의 동영상 예고편을 말한다.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나 QR(Quick Response) 코드를 통해 접할 수 있는 북트레일러는, 활자보다 영상에 익숙한 세대를 사로잡으려고 고안된 홍보 수단이다. 책 속의 삽화 등을 활용해 만드는 간단한 동영상 예고편부터 ‘창작’이라 불러 마땅한 영화 같은 예고편까지 그 종류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특히 최근엔 텍스트를 뒷받침해줄 이미지 자료가 전무한 소설의 북트레일러 제작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에 따라 독자를 유인하려는 ‘미끼’도 나날이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북트레일러에 스타가 떴다.
텍스트, 분위기 강조해 상상력 도발
정수현의 장편소설 (소담출판사)의 북트레일러는 CF·뮤직비디오 감독으로 활동하는 이사강 감독이 만들었다. 이 소설은 한 여자의 육체에 두 여자의 영혼이 함께 머물며 벌어지는 사건을 미스터리 장르로 풀어낸다. 1분40초 남짓의 트레일러에서 이사강 감독은 직접 연기까지 선보인다. 배우들이 연기하고, 이야기와 사건을 짧지만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 트레일러는 기존 트레일러와 차별화된다. 소담출판사 기획편집부 최은정 과장은 “미스터리 소설이고 영상미가 탁월한 소설이라 ‘한 편의 영화 같은 예고편’이라는 콘셉트를 잡게 됐다”
고 설명했다. 이사강 감독의 참여도 “운이 좋았던 경우”라고 한다. “정수현 작가와 이사강 감독은 평소 친분이 있었다. 소설을 재밌게 읽은 이 감독이 정 작가에게 트레일러 제작을 제안했다. 이 감독이 직접 섭외부터 촬영, 편집, 후반 작업까지 해 저예산으로 제작할 수 있었다.” 북트레일러가 자칫 독자의 상상 영역까지 침범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한데, 정수현 작가는 본인이 생각하는 주인공의 이미지와 트레일러 속 이사강 감독이 연기하는 캐릭터가 잘 맞아 독자가 북트레일러를 떠올리며 책을 읽어도 좋을 것 같다고 트레일러에 만족감을 표했다고 한다.
배우 유지태는 신경숙의 소설집 (문학동네)의 북트레일러에 참여했다. 의 북트레일러는 ‘낭독’을 콘셉트로 한다. 신경숙 작가의 담담한 낭독, 배우 유지태와 정인기의 연극 독백 같은 낭독, 그리고 일반 독자들의 개성 있는 낭독이 한데 섞여 묘한 울림을 낳는다. 문학동네 염현숙 편집국장은 “작품 자체에 마음을 건드리는 대목이 많다. 그래서 텍스트만으로도 충분하겠다는 확신이 있었다. 작가와 독자의 육성만 들려줘도 강렬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신경숙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진 유지태에게 출판사는 북트레일러 출연 러브콜을 보냈고, 유지태는 이에 선뜻 응했다. 트레일러 연출은 의 박종철 촬영감독이 맡았다. 박종철 촬영감독도 북트레일러를 만들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름이 알려진 배우나 감독의 북트레일러 제작 참여가 독자의 시선을 쉽게 끄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출판사들이 경쟁적으로 스타들이 참여하는 북트레일러 제작에 열을 올릴 것 같진 않다. 북트레일러가 꼭 책 판매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 제작비 부담이 크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스타들의 참여도 자발적 재능 기부 성격에 머물러 있다. 염현숙 편집국장은 “ 북트레일러 제작비가 처음 예상한 액수보다 두 배나 늘었다. 여러 개의 버전을 만들어서 그런지 추가 비용이 발생하더라. 시간과 노력이 꽤 들어갔다”고 전했다. 최은정 과장은 “스타들의 참여로 관심이 집중되더라도 책 내용이 기대에 못 미친다면 홍보 효과를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스타의 기용으로 반짝 이목을 끄는 것보다는 책과 잘 어우러지는 북트레일러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정유정의 소설 (은행나무) 북트레일러는 그런 의미에서 성공적이다. 트레일러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긴장감 넘치는 사건을 ‘분위기’로 암시하는 데 주력한다. 은행나무 편집부 오가진씨는 “저예산으로 세련되게 만들긴 힘드니 대사는 카피로 대체하고, 1분 내외의 영화 같은 영상을 만드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서스펜스를 유발하는 북트레일러가 책의 콘셉트와 잘 맞아떨어졌다”고 평했다. 그는 또 북트레일러가 책 판매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초판 발행과 함께 북트레일러를 공개했다. 그리고 책이 출간된 지 한 달도 안 돼 이례적으로 영화화 문의를 받았다. 책은 그렇게 빨리 입소문을 타고 퍼지는 매체가 아니다. 북트레일러가 영화 관계자들에게 많이 어필했던 것 같다. 3월에 책이 출간됐고 5월에 판권이 팔렸고 7∼8월에 책이 많이 팔렸는데, 북트레일러가 시발점이 돼 화제를 일으켰다고 본다.”
좋은 책과 맞물려야 화제가 된다
은행나무 출판사는 2월 출간 예정인 전아리 작가의 소설도 북트레일러로 홍보할 계획이다. 북트레일러를 제작한 광고업체 한애드와 함께 ‘스토리를 강조하는’ 드라마 형식의 북트레일러를 만들 거란다. 뿐 아니라 김영하의 , 황석영의 의 북트레일러를 선보였던 문학동네는 시오노 나나미의 동영상 예고편을 준비 중이다. 염현숙 편집국장은 “신경숙 작가의 북트레일러 반응이 좋아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북트레일러를 제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예고편은 어디까지나 본편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다. 두 번째 창작, 북트레일러 또한 독자가 책장을 펼치게 하는 데 최종 목적이 있다. 오가진씨는 “책과 북트레일러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게 중요하다. 거기엔 언제나 책이 우선한다. 책이 좋으면 북트레일러도 따라 화제가 될 수 있지만, 북트레일러만 재밌다고 해서 책이 잘 팔리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좋은 책과 매력적인 트레일러는 함께 굴러가는 바퀴인 셈이다.
이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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