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 역사를 채운 불멸의 기록이 많다. 하지만 그것은 영광의 기록과 저개발의 기록으로 나눌 필요가 있다. 무려 4할이 넘었던 백인천의 시즌 최고 타율, 이승엽의 56개 한 시즌 최다 홈런, 이대진의 10타자 연속 삼진 등이 전자라면, 장명부의 한 시즌 최다 30승(무려 36번의 완투), 19승과 17세이브로 다승왕과 세이브왕을 동시에 거머쥔 송진우, 배영수의 10이닝 노히트노런 등은 후자에 가깝다. 단지 과거의 진풍경이라고 말하기에는 머쓱한 ‘혹사’의 기록이자, 어쩔 수 없이 당대의 우울한 근대화의 풍경과도 겹쳐지기 때문이다. 야구사에서 그 두 가지가 묘하게 결합된 사건은 아마도 1987년 2-2 무승부로 끝난 최동원과 선동열의 15회 끝장 승부였을 것이다. 자신과의 싸움이었다느니 하는 철학적 수사도 적절치 않은 두 남자의 자존심 대결이었다.
영화 〈퍼펙트 게임〉은 24년 전 선동열과 최동원 두 당대 최고 투수의 혼신의 힘을 다한 자존심 대결을 스크린으로 되살린다. 영화에서 선동열 역을 맡은 양동근(위)과 최동원 역을 맡은 조승우.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은 올해 의외의 흥행작이던 처럼 복고 취향의 영화이자, 앞선 야구영화인 (2004)이나 (2007)처럼 지난 세월의 향수를 머금은 시대의 풍경화다. 영화 속 경기가 무려 20년도 더 된 일이니 패배에 흥분한 롯데 자이언츠 홈팬들이 해태 타이거즈 선수단의 버스를 불태우는 장면은 엄연한 사실임에도 지금의 관객은 판타지로 느낄 것이다. 웃통을 벗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그물을 타는 아저씨들의 모습 또한 지나치게 과장된 연기로 느낄지 모르겠다. 그렇게 선수와 팬 모두가 ‘헝그리’하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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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에는 실제와 허구가 뒤섞여 있다. 15회 무승부 대결이라는 굵직한 실제가 핵심이라면 그 외의 것들은 영화적 재미를 위해 적절히 배치됐다. 실화를 다룬 영화에서는 무척 보기 드문 경우일, 그러니까 재현하는 배우가 실제 선수보다 못생겼을 김용철 선수의 경우 실제로는 최동원의 1년 선배로 경남고가 아닌 부산상고 출신이다. 영화 속에서 최동원한테서 극적인 동점 대타 홈런을 빼앗은 만년 후보 박만수는 가공의 인물이다. 한편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지휘봉을 잡기 이전 만년 하위팀의 설움을 겪어온 롯데 자이언츠 팬들이라면, 영화 속 감독의 모습에서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망설여질 것이다. 해태의 김응룡 감독이 냉철한 눈빛으로 선동열에게 비디오 분석 자료를 건네는 모습(이 역시 허구에 가깝다)과 비교해 롯데의 성기영 감독은 인간적 면모와 별개로 그런 분석이나 연구와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이다. 예나 지금이나 ‘꼴데’는 꼴데다웠던 것이다.
은 최동원에게 온전히 바쳐진 영화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의 대표적인 혹사의 기록이라면 역시 그의 1984년 한국시리즈 4승을 빼놓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7차전에서 기적 같은 완투승을 거둔 다음 인터뷰에서 그가 너무나 해맑은 웃음과 함께 한 말은 “자고 싶어요”였다. 그렇게 쉬고 싶어 했던 최동원이 어깨에 진통제를 맞으며 경기에 나서고 죽기 살기로 공을 뿌린다. 장기인 폭포수 커브를 던지기엔 무리인 순간에 다다르자 거의 직구 하나로 상대 타자를 요리한다. 하지만 절대 마운드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날의 패배란 곧 자신의 지난 인생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기 때문이다.
실제처럼 무승부로 마무리되는 라스트신의 감동은 그의 실제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1984년 같은 괴력의 전성기는 지나버렸고 영화처럼 후배 선동열에게 MVP를 빼앗겼으며, 그날의 경기 뒤 이듬해인 1988년 선수들의 이익 보호와 복지 증진을 위해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결성을 주도했다가 삼성으로 강제 트레이드됐다. 그리고 올해 평생의 꿈이나 다름없던 롯데 감독의 한을 풀지 못하고 그만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회가 바뀔 때마다 몇 회인지도 모르고 묵묵히 마운드에 오르는 그 모습은 애처롭고 또한 숭고하다. 실제 경기가 있었던 그날, 최동원과 선동열의 믿기 힘든 혈투는 ‘정규방송 관계로 중계를 마치겠습니다’라는 자막과 함께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은 저녁 뉴스를 통해 경기 결과를 확인할 수밖에 없던 우리를 그 사라진 연장전의 감동으로 초대한다.
쓰러져도 마운드 위에서 쓰러진다한국 스포츠 영화 역사에서 야구는 복싱과 함께 가장 인기 있던 스포츠였다. 프로야구가 시작되기 전 고교야구의 인기는 어마어마했기에 ‘얄개’로 대표되는 여러 당대 청춘영화의 야구선수들은 인기 있는 캐릭터 중 하나였다. 이후 이현세 원작, 최재성 주연의 1편(1986)과 2편(1988)이 엄청난 흥행을 거뒀고 김현석이라는 걸출한 야구 마니아 감독을 빼놓을 수 없다. <ymca>(2002)을 시작으로 선동열을 스카우트하려 했던 ‘한국판 ’ 를 만들었다. 만년 패전처리 투수였던 삼미 슈퍼스타즈의 감사용을 모델로 한 과 장진 감독의 (2004)도 야구 하면 떠오르는 영화다.
그러던 올해 강우석 감독의 와 김상진 감독의 이 연달아 등장한 것은 반갑다. 충주성심학교 청각장애인 학생 야구부를 소재로 한 는 수없이 만들어진 과거 고교 야구부 영화의 풋풋함을 떠올리게 했고, 3년 연속 MVP에 빛나는 롯데 자이언츠의 가공의 괴짜 투수 윤도훈(김주혁)을 등장시킨 은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제작사 모기업 롯데의 전폭적 지원 아래 선수단의 이모저모를 꼼꼼하고 흥미롭게 재현해냈다. 게다가 두 영화는 과도 묘한 연장선을 이을 수 있다. 에서 사고뭉치 선수이자 코치 김상남(정재영)의 둘도 없는 매니저인 찰스를 연기한 조진웅은 바로 에서 김용철 선수로 변신했다. 그리고 은 다큐멘터리 (2009)를 시작으로 을 거쳐 이어지는 롯데 엔터테인먼트의 ‘롯데 3부작’ 완결편이라 할 만하다. 게다가 이들 영화는 역시 올해 나온 할리우드 야구영화 과 정반대의 정서로 이뤄졌다는 점도 흥미롭다. ‘쓰러져도 마운드 위에서 쓰러진다’는 투혼의 명제가 바로 한국 야구영화의 특징인 것.
언론 시사 이후 폭발적 반응을 끌어낸 이후 야구영화는 다시금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을까. 그래서 최동원과 선동열의 마지막 시합 못지않은 또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마구 불려나올지도 모르겠다. 스포츠 영화 팬으로서 야구사의 또 다른 레전드들도 스크린으로 마구 불러냈으면 좋겠다. 국내에서 제일 좋다는 부산 사직야구장이나 다른 지역의 구장들도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옛 모습 그대로다. 1천만 관중 시대를 내다본다지만 딱히 변한 게 없다. 씁쓸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세트나 컴퓨터그래픽(CG)으로 옛날 야구장의 모습을 새롭게 재현해야 한다는 고증 걱정 따위 집어치우고 더 많은 야구영화를 만났으면 좋겠다.
주성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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