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간은 1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하는 꿈만 같은 순간입니다. 여러분은 이제부터 2시간 동안 두 스타 셰프의 창의적인 실험실을 구경하게 될 겁니다.” 미식행사 ‘서울고메 2011’의 자문을 맡은 장피에르 가브리엘이 ‘스타 셰프 마스터 클래스Ⅱ’ 행사에 앞서 던진 말이다. 이날 스타 셰프들의 주방은 한식 재료를 변신시키는 실험실이 되었다.
지난 11월4일 오전, 서울 세종대학교에 위치한 세종컨벤션센터에서 파스칼 바흐보와 상훈 드장브르의 실험실이 공개됐다. 프랑스에서 레스토랑 ‘라스트랑스’(L’Astrance)를 운영하는 바흐보는 일주일간 ‘라스트랑스’의 문을 닫고 주방팀 전원을 데리고 한국에 왔다(그의 요리는 프랑스 현지에서 6개월 전에 예약해야만 맛볼 수 있을 만큼 유명하다). 한국 방문이 처음인 그는 “한국 식재료에서 영감을 받아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하려 한다”고 방문 목적을 밝혔다.
2년 전부터 한국의 식문화를 배우기 시작한 상훈 드장브르도 “한국적 요소를 어떻게 내 요리와 접목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며 “이제는 조금 형태가 잡히는 것도 같다”고 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4살 때 벨기에로 입양된 상훈 드장브르는 ‘분자요리’(Molecular Gastronomy·분자 구조에 따라 음식의 맛과 향이 달라지는 점을 이용해 과학적으로 식재료의 성질과 상태를 변형하는 요리)로 명성을 얻었고, 현재 벨기에에서 레스토랑 ‘레르뒤탕’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의 식재료를 이용한 다양한 ‘실험’은 그야말로 즉흥적으로 펼쳐졌다. 상훈 드장브르는 보쌈, 육회,
갈비를 주 메뉴로 선보였다. 갈비를 설탕에 재우지 않고 뿌리채소인 비트를 구워 단맛을 내고, 보쌈의 퍽퍽한 맛을 줄이려고 특유의 저온가열법으로 삶았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보쌈과 갈비는 퓨전이라기보다는 예전 한식이 지닌 덜 자극적인 맛에 가까울 듯하다.
다양한 채소를 자신의 요리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로 유명한 파스칼 바흐보는 한국의 채소에 관심을 보였다. “한국에선 채소를 재해석해서 많이 먹는 것 같다. 채소의 뿌리까지 이용하거나, 말리고 절이고 발효해서 많이 먹더라.
채소가 제2의 삶을 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국에 도착해 전북 전주의 한옥마을 등을 둘러보다 유자 절임을 맛보고 유자에 반했다는 파스칼은 이날 선보인 많은 요리에 유자를 활용했다. 유자즙, 유자식초, 유자젤 등 유자의 껍질과 과육은 채소에 곁들여져 수백 가지 한식의 새로운 조합을 만든다. 그는 장아찌, 각종 해조류, 두유 등도 자신의 레시피에 반영해 발전시켜나가고 싶다고 했다.
파스칼 바흐보와 상훈 드장브르 외에도 스페인의 호안 로카, 스웨덴의 비요른 프란첸, 미국의 주디 주, 프랑스의 스테판 르루 등 세계적인 스타 셰프 6명이 10월31일부터 11월4일까지 열린 ‘서울고메 2011’에 참가했다. 한국의 식재료와 한식의 맛과 멋을 알리려는 목적으로 올해 3회째 열린 이번 행사에서 해외 셰프들이 특히 관심을 보인 재료는 각종 나물과 된장·간장·고추장 등 발효식품이었다. 영국의 요리 월간지 가 선정한 ‘2011년 세계 최고 레스토랑 50’에서 2위 레스토랑으로 뽑힌 ‘엘 세예 데 칸 로카’의 셰프 호안 로카는 자신의 마스터 클래스에서 한국의 흑마늘과 스페인 요리의 접목을 시도했다. 이미 된장을 이용한 요리를 레스토랑의 정식 메뉴 중 하나로 선보이고 있는 그는 “한국 요리는 스페인 요리와 상당히 비슷하다. 한식은 특징이 확실하기 때문에 앞으로 세계화하는 데 큰 이점이 있을 것이다”라며 한식의 발전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레스토랑 ‘플레이보이 클럽 런던’을 운영하는 주디 주는 ‘한식의 세계화’라는 주제로 진행된 마스터 클래스에서 된장과 겨자를 혼합해 만든 소스를 참치에 뿌린 요리, 푸아그라에 단감 소스를 곁들인 요리 등을 선보였다. 그는 “전통에 충실하라. 그러나 다이내믹해야 한다. 그리고 자부심을 가져라”라며 한식의 변화를 부추긴다.
아이스크림과 양파즙의 합주
상훈 드장브르도 된장을 위시한 한국의 장류에 호의적이다. 그는 “한국의 장은 단맛과 쓴맛, 신맛과도 아주 잘 어울린다”고 했다. 실제로 마스터 클래스에서 선보인 많은 요리에 된장을 가미했다. 마른 멸치를 튀긴 뒤 된장과 참기름을 덧발라 짠맛과 고소한 맛을 더하거나, 숯불에 구운 양파에 겹겹이 된장을 바르고 그 양파즙을 아이스크림 위에 얹는 시럽으로 이용하는 등 독특한 발상을 펼쳐 보였다. “장류를 이용하는 요리법은 무궁무진하다. 요리사의 창의력에 달렸다”는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장맛은 통했다. 구수하고 짭조름한 장맛은 강렬한 재료를 만나 무궁한 합주를 펼쳐 보였다. 한식의 개성은 저 혼자만 튀어보자는 그런 개성이 아니다. 어디에나 두루 어울린다. 자유자재로 변신이 가능하고 조화를 이룰 줄 안다. 그래서 훌륭하다. 파스칼 바흐보는 마스터 클래스를 마무리하며 “한국 음식을 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한식에 들어가는 정성에 크게 감동했다”고 말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마음으로 담근 장맛은 외국의 셰프들에게도 큰 인상을 남겼단다. 결국 정성은 통했다.
이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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