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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디자인의 알파와 오메가

스위스인의 생활 디자인 엿보는 ‘크리스+크로스’전…“디자인은 일상의 문제 해결하는 실천 활동”
등록 2011-09-23 12:19 수정 2020-05-03 04:26

하루 24시간 동안 만지고 보고 사용하는 사물을 한 공간에 모아둔다면 어떤 상태가 될까. 쓰레기봉투에 넣은 철 지난 사물부터 당신이 지금 막 마우스를 콕 눌러 구입하고 싶은 새로운 상품들까지 말이다. 고려대학교 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9월30일까지 열리는 스위스 디자인 ‘크리스+크로스’전은 스위스인의 생활 곳곳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클로즈업해 오밀조밀 들여다보는 전시다. 전시장에 모인 400개가 넘는 스위스 디자인은 작품과 사물의 경계에서 스위스와 전세계를 이동해온 사물의 문화를 보여준다. 미술 교과서에 나올 법한 디자인과 엊그제 식탁에서 건너온 것 같은 생활용품들이 한데 모였다. 어느 도시 공항 면세점을 가도 볼 수 있는 삼각 초콜릿 토블론(Toblerone)도 있다!

<font size="3"><font color="#991900"> 전시장에 모인 400여개의 스위스 디자인</font></font>

스위스 생활용품들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을 실현하려는 듯 치밀한 기능적 고려가 배어 있다. 화려한 디자인보다는 휴대성과 쓰임새를 일일이 따지는 디자인 전통 덕분이다. 크리스+크로스 전에 출품된 도구 상자. 주한 스위스 대사관 제공

스위스 생활용품들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을 실현하려는 듯 치밀한 기능적 고려가 배어 있다. 화려한 디자인보다는 휴대성과 쓰임새를 일일이 따지는 디자인 전통 덕분이다. 크리스+크로스 전에 출품된 도구 상자. 주한 스위스 대사관 제공

스위스에서 건너온 사물들은 백화점 조명과 시장용 디스플레이에서 벗어나 위치한다. 대신 기획자들이 ‘상자’라고 부르는, 이번 전시만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보관함에 담겼다. 이 사각형의 ‘상자’는 각종 전시회에서 작품을 옮기는 데 쓰이는 도구의 형태면서도, 진귀한 사물을 보관하고 보여주는 ‘캐비닛’이자 ‘전시관’이다. 통상적인 이동용 박스처럼 ‘깨지기 쉬운’(Fragile)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는 총 7개의 상자는 각각 ‘롱셀러’ ‘아주 작은 조력자들’ ‘산 위로’ ‘작고 아름답다’ ‘시각적 진술 제시’ ‘도서관’ ‘유행+젊음’과 같은 세부 주제를 ‘단단하게’ 구성해낸다. 나무상자의 느낌은 무언가 준비 중이고 어딘가로 이동할 듯한 전시의 첫 느낌을 경험하게 하지만, 상자 안을 관찰할수록 이런 전시 방식 자체가 스위스 디자인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딱 필요한 만큼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기능적이다.

먼저 오래 쓰인 사물들을 모아놓은 상자 ‘롱셀러’로 다가가본다. 스위스 디자인의 역사가 오롯하다. 50년 전에 출시되었지만 아직까지 생산되고 있는 제품들은 낡고 늙어가는 대신 균형감과 절제의 매력으로 스위스의 시공간을 지킨다. 세계대전에 휩쓸리지 않았던 스위스에선 20세기 초·중반에 실행된 디자인적 실험과 사고가 아직 유지되거나 변형돼 자리잡았다. 1891년 스위스 중부 임바흐에 공장을 세운 칼 엘스너가 코르크마개 따개와 깡통 따개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든 스위스 군용칼은 꾸준히 새로운 디자이너를 만나 형태의 곡선과 커버의 굴곡 등이 시대의 흐름을 타고 진화했다. 이젠 군용칼 디자인을 모티브로 한 USB 스틱도 있다. 스위스의 모든 역에 걸린 1955년 산 하얀 벽시계와 1924년에 만든 지퍼 디자인, 헬베티카 서체에서도 단절된 역사는 찾을 수 없다. 날마다 허물고 세우는 일이 반복되는 이곳 서울에서 50년 전 시계를 차고 다닌다면 놀림감이 될 것을 우려할 만한데, 시간의 흔적이 묻은 60년 전 사물에서도 촌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작고 아름답다’ 상자로 시선을 옮기면 디자인에 깃든 치밀한 노고를 느낄 수 있다. 시계와 맥박 측정기, 진료 도구 등과 함께 예쁘장한 여권에는 독일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로만어·영어로 세부사항이 적혀 있고, 스위스 26개 주의 랜드마크가 꼼꼼하게 들어 있다. 스위스 특유의 세밀함과 숙련된 기술을 보여주는 오브제들이 작지만 당당하다. 그냥 밋밋하고 절제된 표면이 아니라 무엇을 덜어내고 더해야 하는가를 심사숙고하는 과정이 사물 안에 녹아들었다. 그 숙고의 과정은 오래 묵은 깐깐한 정신이 근본이 될 때 가능하다. 물론 유머도 엿보인다. 특히 ‘유행+젊음’ 상자 안에서는 트럭 방수천을 재활용한 가방 ‘프라이타크’(Freitag)처럼 젊은 디자이너들의 상상력을 만날 수 있다.

전시장에서 가장 빛나는 사물들은 상자 ‘아주 작은 조력자들’에 모였다. 압정과 램프, 커피포트 등 각종 생활도구들은 주방과 정원, 공장 안에서 우리 일상의 모든 기능을 구축하고 조력하는 사물들이다. 삼각형 우유팩, 바닥이 둥근 물뿌리개, 어린이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식기류와 같은 사물들은 국내에서 볼 수 있는 일상용품과 기능이나 모양새 면에서 닮아 친숙하다. 디자인이 결국 대상을 상상하고 기억하게 만드는 ‘이미지’와 관계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상자 ‘산 위로’다. 스키·등산 용품 장비 옆에 놓인 그림엽서는 경이로운 산맥 알프스를 ‘세상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곳’으로 만들려는 제작자의 의도가 선명하다.

<font color="#991900"> <font size="3">독일·폴란드 등서 순회전, 10월10일부턴 부산 전시</font></font>

‘크리스+크로스’전은 스위스 예술위원회인 프로헬베티아의 지원으로 독일·폴란드·인도 등을 이동하는 순회 전시다. 일상, 시각문화, 디자인 사물 등을 주제로 한 다른 디자인 관련 전시와 비교해 규모는 크지 않지만 전시 공간을 쓰는 방식과 작품 선택 등이 압축적이고 실용적이다. 스위스대사관과 함께 순회 전시의 국내 유치를 준비한 고려대 디자인조형학부 인치호 교수는 “미세함과 아름다움은 스위스 디자인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주요 요소”라며 “스위스 디자인의 창의력은 기발하고 경이로운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실행 단계”라고 전했다. 결국 스위스라는 나라와 특유의 디자인이 관계 맺는 방식이 전시의 주제인 셈이다. 서울 전시 이후 전시는 10월10일부터 11월10일까지 부산 디자인센터로 이동한다. 전시와 함께 책 (안그라픽스)도 출간됐는데, 책에 쓰인 “스위스에서 디자인은 사물을 발명하고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것”이라는 한 문장은 2011년 한국에서도 오래 두고 곱씹어볼 만하다.
현시원 독립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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