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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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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농 기반 식량주권, 땅과 사람의 관계를 존속하는 힘

농업의 기업화를 타파하고 토착 농업공동체를 통해 사회정의를 실현하자고 호소하는 <비아캄페시나: 세계화에 맞서는 소농의 힘>
등록 2011-08-25 18:37 수정 2020-05-03 04:26

1998년 캐나다 전국농민연맹(National Farmer Union)에 따르면, 그해 캐나다 농부들은 옥수수 1부셸(약 27.2154kg)을 4달러 이하로 판매했다. 그러나 옥수수를 주재료로 한 콘플레이크 1부셸의 판매가는 133달러였다. 콘플레이크 1부셸에 같은 1부셸의 옥수수가 들어가진 않았을 테니 이렇게 놓고 비교하는 건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과 노동을 들여 같은 양의 생산물을 팔았을 때 밀·오트밀·옥수수 등의 작물을 재배하는 농민들은 마이너스 수익으로 파산 지경에 몰린 반면, 시리얼을 만든 켈로그·쿼커오츠·제너럴밀스 등의 기업은 각각 56%·165%·222%의 수익 상승을 얻었다. 그해 시리얼 회사들이 얻은 이윤은 농가의 186~740배에 달했다.

식량주권을 짓밟는 신자유주의

'비아캄페시나: 세계화에 맞서는 소농의 힘'(한티재 펴냄)

'비아캄페시나: 세계화에 맞서는 소농의 힘'(한티재 펴냄)

능력껏 생산하면서도 먹고살 궁리를 할 수 있던 소농의 시대는 이제 끝난 것일까? 농민들은 시든 옥수숫대처럼 속수무책으로 대기업 앞에서 쓰러져야만 하는 걸까? 신자유주의 광풍이 농가에 가져온 혹독한 변화 앞에서 전세계의 농민, 소작농, 농업노동자들은 으스러진 농촌공동체를 다시 건설하려고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중 한 단체가 국제 농민운동조직 ‘비아캄페시나’다. ‘비아캄페시나’는 ‘농민의 길’이라는 뜻이다. 본부는 인도네시아에 있고, 세계 70개국에 지부가 있다. 책 (한티재 펴냄)을 쓴 아네트 아우렐리 데스마레이즈(캐나다 레지나대학 국제연구 프로그램 조교수)는 14년 경력의 농사꾼이기도 하다. 그는 농민과 연구자란 두 개의 시선을 통해 땅과 사람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투쟁하는 비아캄페시나의 활동을 읽고, 이들이 국제 무대에서 무엇을 실천해왔는지를 보여준다.

비아캄페시나의 주된 목표는 식량주권 개념에 기반을 두고 농업 모델을 건설하는 것이다. 식량주권이란 뭘까. 비아캄페시나는 처음에 이를 ‘각 국가들이 문화적·생물적 다양성을 존중하며 기본적인 먹을거리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유지·발전시킬 수 있는 권리’라고 규정했다. 이후에는 이 개념을 더욱 정교화해 ‘민중이 자신의 농업 및 먹을거리 정책을 규정할 권리’까지 포함시켰다. 정리하자면 생산하는 자가 자신이 가진 조건과 토양에 맞게 먹을거리를 생산하고 정책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논리이자 권리다. 그러나 논리적인 척하지만 사실은 이 세상은 속속들이 그러하지 못하다. 그런 비합리를 타파하려고 비아캄페시나 회원들은 하나의 깃대 아래로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식량주권에 대한 비아캄페시나의 기치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로 국내시장을 위해 양질의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데 우선순위를 둔다. 농민에게 충분한 보상이 되는 가격을 제공한다. 이를 위해서는 저가 공세의 수입 농산물로부터 내수시장을 보호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생산방식의 산업화 과정을 중단하고, 지속 가능한 생산에 기반을 둔 가족농을 발전시킨다. 모든 직간접 수출보조금을 철폐한다.”

비아캄페시나는 식량문제와 관련해 각국 정부가 교묘히 말을 바꾸어왔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자. 식량문제는 국제통화 체체의 불안, 유가 폭등 등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냈던 1970년대부터 전 지구적 문제로 대두됐다. 그래서 1974년 세계식량회의에서 각국은 식량을 기본 인권으로 간주하고 10년 안에 ‘기아 근절’을 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이 약속은 캐나다 농부들이 줄지어 파산하는 1990년대에 반토막이 난다. 1996년 세계식량회의는 ‘기아를 절반으로 줄이자’는 선택으로 후퇴했다. 당시 최강대국 미국은 식량에 권리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식량이 기본 인권이며 그것을 국가가 보장할 의무가 있다고 보는 대신 적절한 식량은 ‘목표’ 또는 ‘열망’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2002년 세계식량회의는 식량권을 위해 세계가 기여할 수 있도록 각국 정부는 적정 식량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자발적’ 가이드라인을 개발한다는 행동강령을 채택하는 수준으로 또다시 후퇴했다.

원하는 것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

비아캄페시나는 농업의 세계화가 낳는 폐해가 우리 일상에 끼치는 영향도 조목조목 따진다. 그중 흥미로운 주장이 하나 있다. 농업의 세계화가 ‘비만의 세계화’라는 왜곡된 효과를 낳기도 했다는 것이다. 비아캄페시나에 따르면, 전세계적인 비만의 증가는 농업 변화와 산업화한 먹을거리의 가용량, 관련 소비 증대와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이와 관련해 2002년 범아메리카보건기구는 아르헨티나 건강사회행동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가난한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먹지 못하며 자신이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다만 구할 수 있는 것을 먹을 뿐이다. …식량산업은 낮은 구매력을 가진 계층을 구분하고 그들을 상대로 품질이 낮고 지방과 설탕이 많이 함유된 상품에 대한 대중적 마케팅을 펼침으로써 그러한 소비 패턴을 장려하고 있다.”

애초에 책은 2007년에 쓰였다. 그사이 프랑스어·스페인어·이탈리어 등으로 번역 출간됐고, 올해 우리 글로도 펴냈다. 5년여가 지났지만 책에서 언급한 자료며 사례들은 현재 우리 곁의 일처럼 가깝다. 눈 깜짝할 새 변하는 시대 흐름에 비하면 지구의 농업 문제는 고일 대로 고인 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뜻과 같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여전히 자본과 정부에 의한 토지 강탈이 전세계에서 진행 중이고, 석유·가스·토지에 목말라하는 채굴산업은 농민과 토착민에게서 물 접근권을 점차 더 많이 강탈한다고 개탄한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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