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 그라민은행 여성 대출자들이 모임을 갖고 있다(위). 멕시코의 '시르코 볼라도르'의 공방에서 한 소년이 '상상의 동물'을 만들고 있다. 시대의 창 제공
바야흐로 바캉스의 계절이다. 찾아오고 떠나가는 이들로 세상이 들썩인다. 2006년 독일의 세 청년 얀 홀츠아펠, 팀 레만, 마티 슈피커도 길을 떠났다. 인도 대륙을 시작으로 동남아시아,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를 거쳐 아프리카까지 254일 동안 8만5천km를 이동하며 25개 국가를 여행했다. 그러나 단순한 세계일주가 아니었다. 이들의 여행 계획표에는 관광 책자가 안내하는 화려한 명소, 진귀하고 맛있는 음식은 없었다. 벽안의 세 청년을 오히려 낯설어하는 빈민가와 오염된 지역, 쓰나미에 폐허가 된 마을 등이 그들의 목적지였다. 그곳에서 지역 문제를 개선하고 더 나은 환경을 일구려 노력하는 사회적 기업 활동가, 치열한 생명력을 가지고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마을 주민들을 만난다. (시대의창 펴냄)는 이들의 좌충우돌 여행기다.
얀 일행을 따라 사회적 기업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그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을 먼저 방문해보자. 그라민은행에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담보 없는 대출을 해준다. 1974년 식량 결핍과 기근으로 농민들이 가난에 시달리는 것을 목격한 경제학자 무함마드 유누스는 마을 사람들의 생활을 조사했다. 대부분 겨우 22타카(약 0.22유로, 약 300원) 정도의 돈이 없어서 지독한 곤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은행은 가진 것이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돈을 빌려준다. 유누스는 가난하고 돈이 급한 사람일수록 은행에서 대출받는 것이 더욱 힘들다는 원칙을 깨기로 했다. 분명 실패하리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몇십 년이 지난 지금, 100여 개국에서 이 개념을 도입해 6천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소액대출의 혜택을 받아 자활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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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누스는 세 청년과의 인터뷰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힘없고 돈을 벌 수단도 지식도 없지만 그들만이 가진 놀라운 자산이 있다. 살아남는 법을 가장 잘 안다. 일단 기회만 주어진다면 무슨 일이든 해낸다”며 누구에게든 공평하게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다.
휴양지로 유명한 인도네시아 발리에는 공정무역 기업인 ‘미트라 발리’가 있다. 축제와 명절이 잦고 아름다운 해안으로 화려해 보이는 발리도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되는 불합리한 관행에 얽매어 있긴 마찬가지다. 미트라 발리의 설립자 아궁 알리트 또한 그런 공식을 깨고 싶었다. 그가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발리 특산품인 수공예 제품이었다. 수공예품을 유럽과 일본 등 해외에 판매하는 무역회사들은 잔인한 방식으로 주민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를테면 목각 코끼리 인형 하나의 납품가를 놓고 주민을 경쟁시키는데, 꼭 말도 안 되는 가격에라도 납품하겠다는 작업장이 한 곳씩은 있다. 당장 한 푼이 아쉽기 때문이다. 무역회사들은 입에 풀칠만 하는 주민들의 고단한 삶을 비집고 들어가 막대한 이익을 남기고 있었다. 알리트는 영국의 빈민구호단체 옥스팸의 도움으로 사업을 진행했다. 미트라 발리가 설립되고 발리 수공예 생산자들은 이제 마음 붙이고 일할 곳을 찾았다. 훌륭한 제품을 정당한 가격을 받고 판매하니, 만드는 이도 파는 이도 마음에 거리낄 것 없이 만족스럽다.
멕시코의 ‘시르코 볼라도르’는 범죄조직에 가담하기 쉬운 거리의 아이들을 위한 청소년 문화센터다. 시르코 볼라도르는 ‘날아다니는 서커스’라는 뜻이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현대무용을 배우고, 민속악기를 연주하며, 그래피티를 그리고, 수공예 수업에 참여한다. 여기서 아이들이 만든 용과 악마 가면은 밖에서 아주 잘 팔리는 물건이란다.
설립자 헥토르 카스티요는 암시장, 폭력조직 간의 갈등, 강도로 넘실대던 멕시코시티 구시가지에서 태어나, 대학에서는 사회학을 전공했다. 1980년대 학자로서 멕시코시티 시 외곽에 있는 2500개가 넘는 청소년 범죄조직을 연구하다가 그들이 마음껏 창의성을 발휘하고 예술활동을 할 공간을 제공하자는 생각에 센터를 설립했다. 현재는 매달 5천 명이 넘는 청소년과 성인들이 수업을 들으려고 센터를 방문하며, 센터는 대부분 청소년들이 스스로 결정해서 운영·조직된다. 시르코 볼라도르는 자원봉사를 하고 싶거나 인턴십, 연구 등을 계획 중인 이들에게 늘 열려 있다. 카스티요는 ‘누구든 환영한다’는 뜻으로 이렇게 외쳤다. “비엔 베니도스!”(Bien veni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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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얀 일행은 인신매매를 근절하려고 투쟁하는 타이의 ‘DEPDC’, 쓰레기 관리로 일자리를 창출하는 페루의 ‘시우다드 살루다블레’, 어민들과 연대해 청정보호 해역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세네갈의 ‘오세아니움’ 등을 방문한다.
여행에서 돌아오니 120여 쪽의 여행 일지, 35편의 리포트, 9천 장의 사진, 65시간 분량의 인터뷰와 취재 동영상이 남았다.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이들이 아니다 보니 방대한 자료를 엮은 모양새가 촘촘하지만은 않다. 문장도 투박한 편이다. 여행기와 사회적 기업에 대한 보고서를 동시에 담다 보니 조금 힘이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이 책의 미덕이다. 사회과학 보고서를 읽듯 긴장하며 힘들여 독서하지 않아도 되며, 매끈하지 않은 솔직한 문장에서는 진심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누가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닌데 낯선 나라에서 고생을 감수하며 33명의 사회적 기업가들을 일일이 만나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려 했다는 사실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각 장마다 소개한 사회적 기업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홈페이지와 전자우편, 위치, 활동가 현황은 물론이고 각 기업에서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도 취재해서 넣었다. 근처의 숙박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곳도 챙겨서 정보를 담았다.
책의 헌사를 쓴 그라민은행의 무함마드 유누스는 “우리 모두가 이 별의 조종사이자 항해사임을 잊지 말고 한 번이라도 사회운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것”을 권유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세상에는 가난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지 않을까, 그는 기대한단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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