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세계여행을 했을까. 궁금하다면 다음을 보시라.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인 1487년(성종 18) 11월, 전라도 나주 출신의 선비 최부는 제주삼읍추쇄경차관(본적지를 떠나 부역이나 병역을 기피한 사람이나, 다른 지방으로 도망간 노비를 찾아 본고장으로 송환하는 일을 맡음)으로 파견되었다. 최부가 제주도로 온 지 두 달째인 1488년 1월, 고향 나주에 계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배를 빌려 고향으로 출발한다. 그런데 5리쯤 가니 수상하다. 바람이 고르지 못하니 출발지로 돌아가 순풍을 기다리자는 의견이 동행인들 사이에서 나온다. 그러자 무관 안의가 왕명을 받든 조선의 신하는 배가 표류되거나 침몰한 적이 드물다며 반대한다. 배꾼들은 다시 힘껏 노를 저었다. 그러나 배는 오히려 노를 젓는 방향과 반대로 움직였고 결국 닻줄도 끊겨 표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조선 땅은 점점 멀어져 흑산도가 총알 크기만큼 작아 보였다. 최부는 사람들을 독려하려 했지만 모두 절망에 휩싸였다. 그들은 최부를 원망하면서 애를 써도 어차피 죽기는 마찬가지라고 떠들어대며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배는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와 성난 파도를 뚫고, 해적을 맞닥뜨리고, 긴 행랑채만 한 고래를 대면하고, 표류라는 극한 상황을 맞은 이들의 천태만상(어쩔 줄 모르고 배 안에 드러눕거나, 성내며 소리 지르거나, 배에 들어오는 물을 쉬지 않고 퍼내거나, 쓰러져 죽기만을 기다리거나, 목을 매 스스로 숨을 끊으려 하거나)을 실은 채 떠돌다 15일째 중국 땅에 정박하게 되었다. 35살의 선비 최부와 그 일행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들은 항주·소주·상주 등 당시 중국에서 경제와 문화가 가장 발달한 강남 일대에서 출발해 북진을 거듭해, 천진·북경·요동 등지를 지나 6개월 뒤 한양에 이른다. 최부는 장강 이남과 이북 지역을 비교하며 물산·산업·화폐·주택·음식·복식·풍속·산천·교통·무기 등을 빠짐없이 관찰·기록했다. 조선에 돌아온 최부는 성종의 명에 따라 귀국 8일 만에 6개월여의 여정을 글로 옮기는데, 이것이 지금 국립제주박물관에 보관된 이다.
최부의 표류기는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엮은 (글항아리 펴냄)에 실린 이야기 중 하나다. 책은 여말선초부터 일제 식민지 시기까지 600여 년 동안 있었던 다양한 형태의 세계여행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선별해 소개한다. 관련된 지도·기록화·사진도 꼼꼼하게 담아 볼거리가 많다.
책은 가장 먼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등 고문서를 통해 15세기 조선 사람들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중국을 비정상적으로 크게, 한반도 또한 그에 못지않게 크게(중국의 3분의 1 정도 되는 크기) 담은 반면, 일본과 아프리카, 유럽은 상대적으로 작게 싣고 있다. 이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중국 원대에 만들어진 ‘혼일강리도’를 참고해 제작했기 때문인데, 혼일강리도는 세계 정복을 꿈꾸는 원나라의 야망과 중화사상이 담긴 지도였다. 조선의 지도 제작자들은 조선판 세계지도를 그릴 때 원대의 지도에 담긴 의식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는데, 필자는 이를 통해 조선인들이 조선을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 편입하고 싶어했다고 해석한다.
지도에 담긴 사상이 어떠했든, 지도를 보면 볼수록 조선인들은 중국의 저 거대한 땅덩어리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호기심을 품고 누구든, 언제든 떠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못했다. 현재의 우리가 책이나 영화, 인터넷 등을 통해 미처 가보지 못한 세계를 경험하는 것처럼, 조선인들도 책으로 이웃 중국을 유람하곤 했다. 이 중 는 중국어 학습 교재인데, 고려 상인이 중국 북경으로 가던 중 중국 상인을 만나 함께 중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고 고려에 팔 물건을 산 뒤 귀국길에 오르는 여정을 106개의 장면으로 나눠 대화로 꾸몄다. 는 오늘날의 대부분 외국어 교재처럼 여러 상황에 따른 회화체로 이뤄져 있는데, 스토리가 섬세하고 상황 설정이 생생해 일단 읽기 시작하면 멈추기 힘들 정도로 내용이 흥미진진하단다. 말을 샀는데 콧물을 흘리니 물러달라는 장면, 싼값으로 물건을 구입해 고려에 가서 비싸게 되파는 방법, 귀국 날짜를 택하려고 점쟁이 찾기, 쇼핑하며 물건값 깎기 등 한 편의 시트콤 같은 상황들을 통해 조선인들은 간접적으로 중국을 여행하고 풍물을 맛봤다.
15세기 조선의 여행이 국제무역을 한 상인(), 외교 출장을 떠난 사신(조선통신사), 표류(최부의 ), 납치 및 조공(태종과 세종 때 114명의 공녀 헌납) 등 자의와 상관없는 힘에 의해 이뤄졌다면, 19세기에는 여행에 대한 인식이 선명해지고 여행 자체도 더 넓고 빈번한 방향으로 이뤄졌다. 1896년 민영환 일행은 조선의 러시아 사절단으로 출발해 캐나다와 미국 뉴욕까지 진출했고, 일제강점기 여운형은 독립의 열망을 품고 고비사막의 모래바람을 뚫고 러시아 모스크바를 향해 여행길에 오른다. 또한 1933년 세계일주 길에 오른 연희전문 이순탁 교수는 아시아 9개 도시, 아프리카 1개 도시, 유럽 16개 도시, 북미 6개 도시를 여행한다.
밖에서 바라본 조선인책은 다종다양한 인물들의 여행을 통해 조선인의 세계 인식과 이들이 품었던 호기심, 두려움, 감격 등의 감정을 보여준다. 조선 여성 최초로 세계를 일주한 나혜석은 1927년 남편과 함께 1년8개월 동안 열다섯 나라를 돌아보았는데, 나라 밖에서 오히려 조선인의 모습을 새로이 깨닫기도 한다.
“우리가 여긔서는 여자란 나부터도 할 수 없는 약자로만 생각되더니 거기 가서 보니 정치, 경제, 기타 모든 방면에 여자의 세력이 퍽 많습듸다.”(‘구미만유하고 온 여류화가-나혜석씨와 문답기’, 1929년 8월호) “나는 여성인 것을 학실이 깨다랏다. …그리하여 나는 큰 것이 존귀한 동시에 적은 것이 갑 잇난 것으로 보고 십고 나뿐 아니라 이것을 모든 조선 사람이 알앗스면 십흐다.”(‘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1932년 1월호)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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