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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의 경계를 말소한 사나이

진일보한 분단 영화 <풍산개>… 처절함도 통일 해법 논의도 아닌 탈국적성의 개인 구체화한 ‘혁명적 무정부주의’
등록 2011-06-24 16:11 수정 2020-05-03 04:26
영화 <풍산개>의 한 장면. NEW 제공

영화 <풍산개>의 한 장면. NEW 제공

김기덕 감독이 각본과 제작을 맡고 그의 조감독이던 전재홍 감독이 연출한 가 공개되었다. 는 의 멜로적 형식에, 의 남북관계를 내용으로 담는다. 즉 의 미스터리한 남성과 편협한 남자로 인해 고통받는 여성의 멜로가 한반도를 무대로 펼쳐지고, 의 간첩과 국가정보원 요원 이야기가 액션으로 함입돼 있다. 의 주인공이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근간이 되는 ‘집’의 경계를 허무는 바이러스적 존재이듯, 의 주인공은 넘을 수 없는 국경이자 이데올로기의 장벽인 휴전선을 무단히 틈입하는 존재다. 참 재미난 상상이다.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화력이 집중돼 있는 ‘비무장지대’를 3시간 만에 뚫고 이산가족의 서신과 심지어 사람을 배달해준단 말인가? 이것의 리얼리티를 논하는 건 ‘뻘짓’이다. 이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무엇을 초월하고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논해야 한다.

전제된 규칙으로 활용되는 분단 상황

남북관계에 대한 영화는 꾸준히 만들어져왔다. 와 이 같은 해(1999)에 나온 건 주목할 만하다. ‘간첩’이라는 레드콤플렉스 쩌는 상징적 기표가 다르게 사유되기 시작했다. 남북 분단과 군사적 대치 상황이라는 배경하에서, 간첩은 가엾은 존재로 사유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를 지워가며 ‘조국 해방’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냉엄한 시스템에 이용당하고 인간적 정에 이끌리다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의 흥행 이후, 남북문제는 블록버스터의 가능성으로 사유되었다. 이듬해 가 이를 증명하자, 등 비장미 가득한 액션 블록버스터들이 만들어졌다. 공통된 정서는 처절함이다. 분단과 전쟁은 슬프고 개인은 불쌍하다는 도식의 남성 신파가 이어졌다. 2005년에 이르러서야 좀 유쾌하게 남북 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은 한국전쟁 당시, 평화에 감염된 남북 연합군과 미군 조종사를 통해 남북 군사협력과 국제사회의 교섭 필요성을 역설했다. 역시 통일이 더 이상 민족적 당위가 아니라 경제적 현실 문제임을 환기했다. 신파를 벗어나 통일의 해법을 사유하는 영화들의 출현은 분명 발전이었다.

그러나 는 이런 흐름에 역행했다. 반공 이데올로기와 전쟁 스펙터클을 노골적으로 전시한 이 영화가 단순히 퇴행인 것만은 아니다. 나름의 시대정신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국전쟁까지 남의 나라 전쟁처럼 볼 수 있는, 상업주의와 실용주의다. 이제 남북 문제는 엄청난 이데올로기와 파토스가 덜컥 걸리는 무거운 담론이라기보다는, ‘게임의 법칙’처럼 작용하는 면이 있다. 최근 영화들은 남북 문제를 깊게 건드기보다는 ‘강한 제약’으로 활용하는 측면이 강하다. 같은 해 가 간첩과 국정원의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여기에 당위나 이데올로기는 없다. 남북관계라는 요상한 삶의 제약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자들의 드라마가 있을 뿐이다. 강동원은 간첩이자 간첩이 아니며, 송강호는 국정원 요원이자 국정원 요원이 아니다. 먹고살려고 뛰는 가장이고, 무이념의 ‘휴먼’이다. ‘그림자’의 작전은 북한에서 온 것도 아니었고, 북한의 실체는 나오지도 않는다. ‘그림자’는 의 최민식과 달리,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탈존재다. 에서 분단은 관객의 현실에서 극복해야 할 과제로 다가오기보다는, 얄궂은 드라마의 시공간적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어떤 ‘전제’에 해당된다. 최근 한국전쟁에 관한 영화 도 휴머니스트 인민군과 먹고살려고 부역한 마을 사람들을 통해 탈이념을 말한다. 그리고 한국전쟁의 상황을 무대로 현실 정치의 지역 이권 갈등을 알레고리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 이 시도하는 ‘자신의 소속에서 반쯤 이탈된 존재를 통해 무이념의 휴먼을 말하는 것’과 분단 상황을 전제된 규칙이자 배경으로 활용하는 것이 영리한 타협일 수는 있지만 돌파력은 없다.

블랙코미디가 된 남북관계 60년사

는 이런 한계를 넘고자, 모든 소속에서 완전히 이탈된 존재를 내세운다. 주인공은 남북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휴전선을 넘나들며, 국정원과 간첩단에 붙잡힌 그에게 남한 사람인지 북한 사람인지가 무수히 질문되지만, 질문에 일체의 단서도 없다. 그는 대사가 한마디도 없다. 억양이 남북 어느 쪽인지를 지시할까봐 그리했다고 한다. 는 휴머니스트 간첩을 통해 ‘휴먼’(Human Being)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경계가 그의 정체성에서 완전히 말소된 존재를 통해 국가 이후의 ‘개인’(Individual)을 말한다. 이것은 김기덕 감독 초창기 영화 (1997)에서 디아스포라 남북 청년의 탈국적성이 구체화된 형태이고, 에서 송두율과 한국 사회가 무수히 질문했으나 결국은 형상화하지 못한 ‘경계인’의 픽션적 화답이다. 는 분단 상황을 전제로 현실 정치의 다른 면을 알레고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의 길을 간다. 즉 간첩단과 국정원의 행위를 완전히 포개지는 거울상으로 제시하며, 남북관계 60년사 자체를 전제가 아닌 문제로 사유해 블랙코미디로 무화시켜버린다. 영화는 분단의 해법이 남북 대의체의 협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국가의 중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강한 단독자에게 있음을 상징적으로 제시한다. 그는 흡사 ‘초인’이거나, ‘천사’의 이미지를 지녔다. ‘혁명적 무정부주의’의 상상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황진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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