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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통해 시대와 ‘나’를 말하다

이이화·김삼웅·안재성씨가 전하는 평전 쓰기의 괴로움… 폭넓은 취재, 역사 연구, 객관적 태도 거쳐 복원되는 한 ‘시대’
등록 2011-06-09 15:07 수정 2020-05-03 04:26
» 왼쪽부터 안재성 작가, 김삼웅 전 독립관장, 역사학자 이이화씨. 사진 왼쪽부터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 김진수, 한겨레 강재훈

» 왼쪽부터 안재성 작가, 김삼웅 전 독립관장, 역사학자 이이화씨. 사진 왼쪽부터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 김진수, 한겨레 강재훈

소설가 안재성씨는 2006년 생전 오른 적 없는 지리산을 7번이나 올랐다. 한 빨치산 지도자가 남긴 삶과 죽음의 흔적을 찾아나선 길이었다. 대성골과 피아골, 뱀사골, 빗점골 등 지리산의 골짜기를 샅샅이 훑었다. 무리한 산행의 후유증은 오래갔다. 돌아올 때마다 허리병이 도져 침을 맞고 며칠씩 아랫목 신세를 져야 했다. 그는 산행을 통해 얻은 견문을 2007년 출간된 (실천문학사)에 고스란히 녹여냈다. 그는 “작은 전투 하나도 주변 지형과 풍경 이미지가 머릿속에 담겨 있어야 제대로 기술할 수 있다”며 “사료와 사료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작가의 상상력은 현장 취재와 인터뷰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많이 읽고, 만나고, 돌아다녀야

평전을 쓰는 일에 대해 작가들은 “기록과 사람, 공간의 제약과 싸우는 작업”이라고 한다. 그만큼 많이 읽고, 만나고, 돌아다녀야 좋은 평전이 나온다는 얘기다. 안씨도 이현상의 평전을 쓰려고 빨치산이 남긴 각종 보고서와 선전물, 식민지 시대 재판 기록과 신문, 함께 활동했거나 동시대에 살았던 관련 인물의 수기와 회고록 등을 섭렵했다. 자료를 모아놓으니 사과 박스 3개 분량이 넘었다. 자료를 싸들고 국토 최남단 마라도의 한 사찰에 들어갔다. 온종일 두문불출하며 자료를 읽고 분류한 뒤 시간대별로 일지를 정리해 섬을 나오니 2개월이 흘러 있었다.

살아 있는 평전을 쓰려면 인물이 속했던 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에 대한 공부도 게을리해선 안 된다. 비교적 근세에 살았던 인물이 아니라, 시간적 거리가 먼 역사 속 인물의 평전을 쓸 때는 더욱 그렇다. 평전의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가 특정 시대의 총체적 사회상을 한 인물의 생애를 통해 온전히 드러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 작업엔 인물이 속한 시대에 대한 통사적 지식은 물론, 정치·사회·문화사적 인식이 총동원돼야 한다. 시대에 대한 정교한 인식망이 구축된 뒤에야 인물의 행적과 언행, 인식에 대한 엄정한 평가도 가능하다.

인물에 대한 감정이입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김구, 신채호, 장준하, 조봉암 등 10명이 넘는 현대사 인물의 평전을 쓴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평전을 쓰다 보면 대상 인물에 대한 선호도 때문에 자칫 미화하거나 불미한 사안은 소략하려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며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인물의 모든 행동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작업이 되고 만다”고 말했다.

인물에 대한 평가가 들어가는 탓에 출간 뒤 겪게 되는 어려움도 만만찮다. 국내 인물의 경우 유족이 생존해 있거나, 근대 이전의 인물이라도 후손이나 문중이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경우 난관이 한층 배가된다. 오랜 기간 인물 한국사를 집필해온 역사학자 이이화씨는 “잡지에 인물사를 연재할 당시엔 아예 전화선을 뽑아놓고 지냈다”며 “일일이 응대하다 보면 ‘눈치’를 보게 되고 글쓰기 자체가 불가능해진다”고 했다.

주관적 평가, 평전 쓰기의 숙명

평전 쓰기의 어려움을 키우는 것은 글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결국엔 작가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인물의 생애와 활동을 서술하면서, 인물은 물론 그가 속한 시대에 대한 주관적 평가까지 드러내야 하는 게 평전 쓰기의 숙명인 탓이다. 이런 연유로 작가들은 평전을 쓰는 일은 결국 ‘글쓴이 자신의 역사적 태도와 문화적 인식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이 시대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서거정의 평전을 집필 중인 김풍기 강원대 교수(국문학)는 여기서 비롯되는 어려움을 이렇게 표현한다.

“무당은 자신의 몸을 빌려서 ‘그’의 이야기를 하지만, 평전을 쓰는 사람은 과거의 목소리를 빌려 지금 ‘나’의 생각을 드러내자는 것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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