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1일 낮 2시 경기도 용인 러스크병원. 그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신음 같은 웅성거림이 가득한 재활치료실이었다. 그는 소리를 뱉는 대신 아직도 감각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 40년 넘게 기타 6줄을 자유자재로 탐하던 오른손이 지금은 치료사가 시키는 대로 쥐고 펴기에도 힘이 부쳤다. 여기는 가수 조덕배(52)의 전쟁터다.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한 전장에서 그는 지금 목발 짚고 일어서려 하고 있다. 5월21일 재기 콘서트가 열흘 남은 날이었다.
무덤 앞에서 되돌아온 사람<embed pluginspage="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 src="http://img.hanitv.com/Player/PFPlayer.swf" width="509" height="350"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wmode="transparent" allowfullscreen="true" allowscriptaccess="always" flashvars="msid=2059&auto=&loc=1" quality="high"></embed>의 가수 조덕배는 2년 넘게 나쁜 꿈에 갇혀 있었다. 2009년 4월22일 경기도 미사리로 공연하러 가는 길이었다. “갑자기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집사람이 왜 그러냐고 장난치지 말라고 하는데 갑자기 한쪽 팔이 저절로 올라가고 안 내려가더라고요. 그길로 아산병원에 달려가 응급실 침대에 누웠어요. 조덕배야, 조덕배가 왔어 하는 소리를 듣다가 정신을 잃었어요.” 뇌혈관 4cm가 찢어졌다고 했다. 5cm가 넘었다면 돌이킬 수 없었을지 모른다고 했다. 1cm 차이로 무덤 앞에서 되돌아온 그는 8개월 가까운 시간을 병실에서 보냈다. “병원에 있으면 시간이 정지된 것 같아요. 스튜디오에 있는 줄 알았는데 눈을 떠보면 병실이더라고요.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무서웠죠.” 옆 침대의 신음소리에, 다시는 노래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을 설쳤다. 퇴원해서도 움직일 수 없었다. 부인과 딸이 아침마다 그를 매트리스에 태워 화장실로 데려가곤 했다.
희망과 절망 사이의 넓고도 깊은 골짝에서 좌절하던 나날이었다. “이 병에 걸리면 희망보다 절망이 빨리 생각나요.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버텨야 하지만 희망이라는 짧은 말 속에 있는 의미와 내용은 크고 방대했어요. 쓰러진 다음날 주치의를 만나자마자 ‘나 노래 다시 할 수 있을까요’ 물었죠. 주치의가 ‘할 수 있으니 연습 많이 하시라’ 했는데 지난해 말에야 그 의사가 거짓말한 게 아니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올 초엔 팔에 힘이 붙고 목소리가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숨차게 공연을 잡았다. 2008년 크리스마스 디너쇼 이후 2년6개월 만이다. “아직 완쾌되지 않았는데 무리해서 콘서트 하는 거예요. 조덕배가 30년 동안 다리는 불편했지만 멀쩡한 모습으로 노래했는데 이제 아파서 아픈 모습 감추지 않고 노래한다고, 좀 봐달라고 떼쓰는 거예요.” 을 부른 최호섭이 그와 나란히 무대에 서고 윤도현, 추가열, 적우, 최백호, 박상민, 빅마마 이지영이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공연은 자연스레 ‘조덕배 위드 프렌즈’가 되었다.
공연 날짜가 다가오자 전엔 손사래 치던 텔레비전 출연도 여러 번 했다. “예전엔 얼굴 없는 가수라는 이미지를 내세웠어요. 나가기 싫어서 전략을 그렇게 세웠어요. 그런데 이번에 병원에 누워서 생각해보니 나가기 싫어서 안 나간 게 아니라 소아마비 걸린 몸을 보여주기 싫어서 그런 거였는데 나 자신을 속이고 살았더라고요. 지금은 깊은 늪을 건너서 가는 거니까 솔직하게 가고 싶어요.” 이렇게 절실한 무대가 있을 줄은 그도 몰랐다.
“전두환 덕에 가수 됐다”전에는 어떤 꿈을 꾸었더라. 가수 조덕배는 돌 즈음 소아마비에 걸린 탓에 목발 없이는 걸을 수 없다. 1978년 데뷔 앨범을 냈지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예전엔 어머니가 대준 돈으로 만든 앨범이라고만 했지만 재기 무대를 앞두고 처음으로 솔직히 집안 내력을 털어놓았다. 가수를 하겠다니 어머니가 서울 청담동 땅 300평을 팔아서 앨범을 내주었단다. 음반이 안 팔려서 가업을 이으려고도 했다. 그의 작은아버지 조봉구씨는 5공화국 당시 재계 서열 9위인 삼호그룹 회장, 조덕배는 삼호건설 계열 도장(塗裝) 회사인 (주)삼호까뮤 대표로 일했다. “1984년 이순자 당시 영부인이 방배동 작은아버지 집으로 찾아왔다고 합니다. 마당에 있는 미루나무를 뽑아 달라고, 자기 집 정원으로 옮겨 심자고 하는 걸 숙모님이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작은아버지를 이어 삼호건설 회장을 맡았던 조영신씨가 합동수사본부로 끌려가서 백지 서류에 도장을 찍어야 했습니다. 회사는 모두 남의 손에 넘어가고 일가족은 흩어져서 숨어지냈습니다.” 1985년 마지막 남은 3800만원짜리 삼호주택 어음을 바꿔서 만든 앨범이 였다. 노래 부터 까지, 가수 조덕배의 이름을 널리 알린 음반이다. 그래서 그는 “나는 전두환 전 대통령 덕에 가수가 되었다. 아니면 페인트만 칠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2집 가 130만 장 팔리며 히트 가수가 됐지만 불안도 같이 찾아왔다. “5집까지 내는 족족 히트 칠 때 정말 불안했다. 낙하산도 없이 점점 높이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처음엔 여기서 떨어지면 아프겠네 하다가, 그다음엔 여기서 떨어지면 죽겠네, 나를 쳐다보는 저 시선들을 어쩌지. 그래서 돌변했다. 난 조덕배야, 이젠 나는 숨소리만 내도 팔릴 거야 하며 낸 게 6집이었다”고 되돌아본다. 주변 사람들 말에 따르면 1993년 조덕배는 1억5천만원을 들고 프랑스 파리로 날아가더니 달랑 2곡 녹음해서 돌아왔단다. 프랑스 샹송의 무드에 젖은 이 그때 만든 노래다. 조덕배의 감성적인 창법을 걷어내면 본디 그가 만드는 노래는 재즈풍의 포크·발라드·샹송 등 다양한 장르의 합작품이다. 이 노래는 그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독특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는 기념품 같은 노래다. “그때나 지금이나 계보가 없었어요. 쉘부르도 동아기획도 아니고. 이문세만 좀 알고 지냈어요. 늘 외롭고 의논할 사람도 없고 그러고 살았지요. 어쨌거나 나는 싱어송라이터니까 항상 다른 음악에 대한 욕심이 있어요. 6집을 내며 다른 걸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에 대마초 혐의로 잡혀갔어요.” 그때부터 그의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찾아온 4번의 구속과 수감. 이제 조덕배는 몇 번이고 말한다. 예전엔 히피의 세계에 살았지만 이제 논픽션 세계에서만 살겠노라고, 그동안 너무 다쳤다고.
그가 꿈꾸는 해피엔딩밤 10시 서울 양재동 연습실. 1980년대 청춘들의 꿈자리를 횡단했던 조덕배는 지금 자신의 새로운 꿈을 다듬는다. 드럼 배수연, 건반 이홍래·송광식, 퍼커션 염성길, 기타 한현창, 베이스 신현권. 내로라하는 세션맨들이 그의 입만 쳐다본다. “많이 돌아왔는데 입이 아직 찌그러지잖아요. 이쪽 근육이 덜 돌아와서 그래요. 가수에겐 음색이 생명인데 음색도 덜 돌아왔어요. 사람들이 내 목소리를 칭찬할 때 나는 재수 없는 목소리라고 했어요. 그 목소리를 이렇게 그리워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는 남이 있을 때는 기타나 노래를 연습하지 않는다. “휘어진 내 기타 소리에 식구들 마음도 휘어질 것 같아 혼자 있을 때만 기타를 잡았어요.” 노래도 아무도 듣지 못하도록 목욕탕에서 물을 있는 대로 틀어놓고 한다. 조덕배의 목소리는 변했다. 흐느끼고 속삭이던 창법이 한결 평탄해졌다. 그런데 기교가 줄어든 자리에 울림이 깊어졌다. “나를 기억하는 팬들 앞에서 완벽하지 못한 목소리를 낸다는 게 미치도록 불안하지만 이 불안조차도 즐겨보자고 해서 시작했어요. 내 인생에 이런 공연은 한 번뿐일 거예요. 옛날이라면 숨었겠죠. 텔레비전에 완벽하지 못한 모습으로 나오니까 어떤 사람은 뭐하러 나가서 얼굴 팔고 오냐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행복에 겨워서 기꺼이 팔았어요.”
자정이 가까워질수록 목소리가 더 트였다. 여전히 거칠지만 낭만 이상의 절실한 것을 전하는 음색이다. 은 최호섭과 같이 부른다. 은 보사노바풍으로, 는 뽕기 가득한 발라드로 바뀌었다. 그가 2007년 9집 앨범을 낼 때 시도했던 변화다. “대중과 소통하고 싶어서 크로스오버를 시도했어요. 음악성과 대중성이 부닥치는 모습들이 많이 튀어나오기도 했지만 먹히고 안 먹히고를 떠나 다른 장르를 시도해볼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건강하기만 했다면 또 시도했을 것 같아요.”
조덕배는 질긴 꿈을 꾼다. 자다가 일어나면 발병 전인 2년 전 몸으로 돌아가 있을 것만 같아서 매일매일 그런 날을 꿈꾸며 잠자리에 든다. 그러다가도 무언가 새로운 음악을 만들 것을 궁리한다. “죽음의 맛을 본 이 경험이 내 음악에 무엇이 될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나머지 인생은 순탄하게 음악만 생각하며 살 수 있기를 바라요. 마지막 페이지는 진짜로 가수답게 뮤지션같이 끝낸다면 내 인생이 해피엔딩이 될 것 같아요.”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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