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님! 왜 20÷3=7인지 세 가지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왜 527+694=1221인지를 만 8세 된 초등학생들이 세 가지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까? 어른인 저도 모르겠어서 참고서를 봐야 합니다. 혹시 장관님께서도 모르시겠다면 동봉해드린 OO전과 26쪽의 7번, 57쪽의 11번 설명을 보시면 됩니다.”
한 학부모가 초등학교 3학년인 자녀의 수학 교과서를 보다가 화가 나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에게 보낸 질의서의 내용이다.
요즘 초등학교 교과서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시중에 나오는 동화책이나 학습지처럼 디자인이 예쁘고 종이질도 좋다. 얼핏보면 아이들이 공부할 맛 나겠다 싶다. 그러나 앞서 학부모의 지적대로 현재 초등학교 교과서는 여러차례 개정을 거듭하면서 아이들의 수준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체계 없이 짜깁기만 반복해 아이들과 학부모, 교사 모두를 힘겹게 하고 있다.
잃어버린 역사 수업
(바다출판사 펴냄)를 쓴 초등교육과정연구모임의 한 교사는 지난해 자신이 담임을 맡았던 4학년 학생 30명에게 이렇게 물었다. “교과서 하면 떠오르는 것은?” 예상할 수 있는 답변으로는 공부, 숙제, 시험, 지식, 학교가 있었다. 일부는 짜증, 지겨움, 싫음, 지옥이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그것도 꽤 많은 아이들이 부정적인 대답을 내놨다. 화려한 색을 입힌 교과서는 사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아이들의 목을 죄고 있었던 것이다.
올해부터 초등학생 아이들은 모든 학년이 2007 개정 교육과정에 맞춘 새 교과서로 공부한다. 2007 개정 교육과정은 지난 2000년에 만든 제7차 교육과정을 토대로 바꾼 것인데, 현장에 있는 교사와 학부모,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보면 개정이 아닌 개악인 듯하다.
더구나 2007년 교과서가 개정되면서 지난 4년여의 과도기에 일부 학년은 초등학교 6년 중 일부를 7차 교육과정으로, 나머지 몇 년은 2007 개정 교과서로 공부해야 했는데, 교과서 내용이 학년을 넘나들며 무질서하게 섞이다 보니 아이들의 의지와 다르게 심각한 학습 결손을 겪게 됐다.
예컨대 사회 교과의 역사 영역의 경우 6학년 1학기에 있던 내용이 개정 교과서에서는 5학년으로 내려가버렸다. 5학년까지 7차 교육과정으로 공부한 아이들은 역사의 한 영역을 배우지 못한 채 중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5학년 아이들도 어려워하던 지리와 경제는 3~4학년 교과서로 내려가버렸고, 7차 교육과정에서 초등학생 수준에서 너무 어려워 중학교로 보냈던 방정식, 정비례와 반비례 내용이 다시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구멍난 학습 내용만이 문제가 아니다. 더 가관인 것은 이런 개정안이 아이들의 발달 과정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점이다. 5학년으로 내려간 사회과 교과 역사 부분의 예를 들어보자. 아이들은 6학년 무렵이 되면서 비판적 사고를 하고 자신만의 세계관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역사에 흥미를 가지는 시기라서 역사 수업 자체를 재미있어하는 아이도 많고 교사도 수월하게 수업을 할 수 있단다. 그러나 1년 차이임에도 5학년과 6학년은 많이 다르다. 교사들은 5학년이 어린이로서 마지막 단계라고 할 정도로 아직 어리기 때문에 역사를 다양하게 해석하고 바라보는 관점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비단 고학년의 문제만이 아니다.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1학년 교과서는 아이들에게 연필 잡는 법(1단원)을 가르치자마자 한글을 찾아 쓰라 하고(2단원), 이어 소리와 글자가 다른 낱말을 고쳐 쓰라고 한다(3단원). 이제 막 소리와 글자의 모양을 연결짓기 시작했는데, ‘생년필’을 ‘색연필’로, ‘옌날’을 ‘옛날’로 바꿔쓰라는 요구는 아이들이 소화하기 어렵다. 4단원에서도 수준은 널뛰기 한다. 자기소개서를 간단히 적어 친구에게 발표하라고 한다. 한글을 미리 깨치지 못하고 초등학교에 들어온 아이들은 당황하기 시작한다. 수업이 재미없고 어렵고 화가 난다.
체육과 미술을 통합해 놀이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교과도 아이들에게 전혀 즐겁지 않다고 한다. 한 교사의 경험에 따르면, 1학년 1학기, 남생이 등딱지를 직접 만들어서 등에 메고 노는 내용을 수업할 때였다고 한다. 아이들이 신나서 등딱지를 만들어 색을 칠하고 등에 멨는데, 놀다 보니 애써 만들어놓은 등딱지가 찢어지고 망가진다. 아쉬움에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도 있었다. 은 울음이 넘실대는 뒤죽박죽 괴로운 수업이 되었다.
난감한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교사들의 한숨은 이어진다. 수학 교과서는 앵무새처럼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를 반복한다. 모든 아이가 수학자와 같은 대답을 내놓을 순 없다. 대부분은 이런 질문에 맥없이 “그냥”이라 쓸 뿐이다. 국어 교과서는 끊임없이 본인의 의견을 잘 정리해 쉽게 말해보라고 한다. 교과서 자체가 어려운데 아이들이 무슨 수로 쉽게 말한단 말인가. 창의 인재를 육성하는 차세대 교과서를 표방한다는 과학 교과도 방대한 내용을 담아 교사들은 진도 나가는 데 급급하다. 정작 아이들이 흥미를 보이는 과학실험은 후다닥 끝내게 하고 심지어는 불에 약한 은박지를 불 조절이 힘든 알코올램프를 이용해 실험하라고 요구하는 따위 가장 기본적인 위험성마저 고려하지 않는 실수를 보인다.
초등교육과정연구모임 교사들은 초등 교과서에 문제가 많은 이유로 교과서 집필·감수 과정의 부실을 꼽는다. 교과부는 현장에 있는 교사에게 일하는 틈틈이 주말 워크숍을 다녀오라고 한 뒤 곧바로 몇 단원을 맡아 쓰게 하거나, 대학원에 다니는 교사들에게 집필을 요구한다. 교과서 개발 기간도 짧아 한두 달 만에 번갯불에 콩 볶듯 집필을 끝내야 한다. 문제 제기를 하고 싶어도 교과부에 초등교육을 총괄하는 부서가 따로 없다. 문제를 포괄하는 경로 자체가 없으니 교사들은 답답하다.
핀란드는 학급당 학생 수가 10~20명이며 담임도 2명씩 배정돼 있다고 한다. 처음 학교 생활을 시작하는 저학년일 때 집중해서 잘 보살펴야 학습 습관이 잘 잡히고 학습 격차도 많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은 1학년 1학기부터 아이들을 절망하게 하고 어려운 교과서는 사교육을 부추긴다. 똑똑한 아이들마저 미리 공부해오지 않았다면 자신이 부진하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이 땅의 학교에서 언제쯤 아이들은 수업이 신나고 즐겁다고 느끼게 될까.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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