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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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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증 걸린 제국의 신민

테러리스트가 아님을 증명하려는 인도계 ‘착한’ 무슬림의 분투 뒤로

‘포스트 9·11’ 미국의 집단적 애국주의가 또렷한 영화 <내 이름은 칸>
등록 2011-03-25 14:02 수정 2020-05-03 04:26

영화는 짐 수색으로 워싱턴행 비행기를 놓친 칸이 “대통령에게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고 말하러 간다”고 밝히는 것을 시작으로 그의 사연을 풀어놓는다. 인도계 무슬림이고, 자폐증의 일종인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칸은 미국에서 화장품 외판원으로 일하며, 미용사인 인도계 힌두교도 싱글맘과 결혼해 행복했다. 그러나 9·11 이후 무슬림이란 이유로 배척당한다. 미용실은 문을 닫고, 아들은 집단폭행으로 사망하지만, 아무도 증언하지 않는다. 절망한 아내가 “대통령에게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고 말하고 오라”고 소리치자, 칸은 대통령을 쫓아다니다 테러리스트로 오인받아 체포된다. 체포의 정당성을 묻는 방송이 전파를 타고, 그가 체포되기 전 사원에서 만난 교수를 신고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석방된다. 석방 뒤 조지아주에서 수해 구호활동을 하는 그의 모습이 방송되고, 미국 사회에 반향을 일으킨다. 이웃 소년은 6개월 만에 아들의 죽음을 증언하고, 아내는 칸을 찾는다. 그러나 칸의 신고로 잡혀간 교수의 추종자는 칸을 찌른다. 마침 대통령에 당선된 오바마에 의해 칸의 소원은 성취된다. 칸이 오바마를 만나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 <내 이름은 칸>

영화 <내 이름은 칸>

‘착한‘ 무슬림과 ’나쁜’ 무슬림이라는 이분법

영화는 9·11 이후 미국 내 반이슬람 정서의 부당함을 고발하고, 종교 간 화합을 주장하는 ‘착한 영화’로 읽히기 쉽다. 그러나 몇 가지 의문을 따라가보면, 영화가 역설하는 ‘관용의 정치학’이 지닌 허구성이 그대로 노출된다.

첫째, 영화는 인종이나 종교가 아닌, 행동에 의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구분돼야 함을 역설한다. 그런데 선한 행동과 나쁜 행동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영화132는 그가 선함을 증명하기 위해 자선기부, 신고, 구호활동을 내세운다. 그중 테러리스트가 아님을 증명한 결정적 행위는 신고였다. 무슬림이 통째로 ‘나쁜’ 사람들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영화는 칸은 ‘착한’ 무슬림이고, ‘나쁜’ 무슬림은 따로 있다고 말한다. ‘무슬림 or not’에서 ‘착한’ 무슬림 대 ‘나쁜’ 무슬림으로 전선이 이동한다. 그러나 여전한 흑백 이분법이며, ‘나쁜’ 이슬람은 증오의 대상으로 남는다. ‘착한’ 무슬림은 받아들이자는 ‘관용의 정치’에서, 무슬림은 자신이 ‘착한’ 무슬림임을 증명하기 위해 ‘나쁜’ 무슬림을 적극 신고해야 한다. 마치 월남한 서북청년단이 극렬 반공주의자로 활약하거나, 식민지 엘리트가 제국에 더욱 충성하듯이. 그가 신고한 교수는 진짜 테러리스트였을까? 알 수 없다. 무슬림만 모이는 사원에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 등을 비판한 그를 (아스퍼거 장애로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파악하는) 칸은 ‘사탄’이라 부르며 신고해버린다. 이웃끼리 막걸리 마시며 정부를 비판하다가 누군가의 신고로 끌려갔다는 일화가 떠오르는 대목이지만, 영화는 체포에 협조해주어 고맙다는 기관원의 인사로 혐의를 확신시킬 뿐 그가 무슨 혐의로 어떤 고문을 당했는지는 다루지 않는다. 영화에서 칸의 신고정신은 ‘착한’ 행위의 귀감이며, 마지막엔 칼까지 맞음으로써 ‘우리 편’임을 재확인시킨다. 석방 뒤 칸이 조지아까지 가서 구호활동을 편 이유는 무엇일까?(165분짜리 인도판에는 이라크에서 전사한 흑인 병사의 동생과 칸이 조지아주에서 우정을 나누는 장면이 있지만, 127분짜리 국내판에는 아무 설명이 없다.) 이 역시 칸의 애국심을 증명하는 적극적 알리바이가 된다. 영화는 말한다. 이토록 미국을 사랑하는 칸이 단지 무슬림이라고 내쳐서야 되겠느냐고. 그러나 이러한 ‘관용의 정치학’에서는 9·11의 근원이 된 미국의 중동정책에 관해 사적으로 말할 자유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둘째, 영화는 9·11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영화에서 9·11 이전의 미국은 이민자들의 천국이다. 어떠한 인종이나 종교에 대한 차별도 없다. 유일한 종교적 갈등은 무슬림이냐 힌두교냐를 따지는 ‘편협한’ 인도인들 간의 다툼이다. 동생 부부는 미국 명문대학을 나와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었고, 칸은 장애인이고 아내는 싱글맘이지만, 백인 중산층 가정의 이웃으로 산다. 칸의 장애는 미국에 와서 정확히 이해되고, 그가 영업으로 성공할 수 있을 만큼 미국인들은 장애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진다. 계급, 인종, 종교, 성차, 장애가 전혀 문제되지 않는 ‘아름다운 나라’에 오직 9·11이라는 돌멩이가 날아와 증오의 씨가 뿌려진다. 영화는 미국 백인 중산층이 9·11에 대해 품는 순진한 화두 “Why me?”를 인도계 무슬림의 등에 지우고 순례에 나서게 한다. 질문의 답은 대통령이라는 신이 쥐고 있다. 영화에서 미국은 대통령이라는 하나의 기표로 통일된 공동체다. 물론 현실의 미국은 분열돼 있고, 대통령은 신이 아니다. 부시의 경호원들이 그를 체포하듯이. 그러나 분열은 새 흑인 대통령에 의해 말끔히 봉합될 수 있다고 믿으며, 영화는 오바마를 통해 신의 자비와 응답과 강림을 현시한다.

자폐증, 유일하게 관용되는 신민의 사고

영화가 공들여 묘사하는 아스퍼거 증후군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내러티브의 필연성을 맡는다. 환유나 관용구를 파악하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자폐증에 의해 아내의 명령을 강박적으로 수행하려는 그의 행동이 설명된다. 한편으로 자폐증은 그의 무고함을 증명하는 장치다. 장애는 그를 나쁜 의도를 품을 수 없는 천진한 존재로 탈색시키며 관용을 호소한다. 그러나 더욱 본질적으로 자폐증은 영화 전체의 의식을 대변한다. 영화는 오직 개인에 매몰돼, 사회적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는 유아론적이고 자폐증적인 사고를 포스트 9·11 시대의 제국에서 유일하게 관용되는 신민(臣民)의 사고로 추천한다. 즉 이슬람을 오직 개인적 신앙의 차원으로 믿을 뿐 정치·사회적 맥락은 사고하지 않는 ‘착한’ 무슬림, 미국을 대통령이라는 기표 아래 통합된 ‘아름다운 나라’로 문자 그대로 믿는 공화주의자, 투철한 신고정신과 자선과 구호에 앞장서는 애국시민만이 천국의 신민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폐 천국, 불신 지옥?’이 이 영화의 정치학이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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