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아시아 근대미술? 외국 미술 하면 프랑스 인상파나 미국 팝아트, 중국 산수화 정도를 떠올리는 한국 미술판에서는 참 낯선 말이다. 지리적으로 이웃이자 20세기 이후 서구·일본의 식민 지배로 비슷한 고난의 민족사를 겪었지만, 서구 미술 따라하기가 절대 목표였던 아시아 각국 미술가들은 서로의 미술 역사를 눈여겨볼 새 없이 달려왔다.
사진 같은 사실주의에서 초현실주의까지오는 7월27일부터 서울 덕수궁미술관에서 국립현대미술관과 싱가포르국립미술관, 한겨레신문사 공동 주최로 열리는 ‘아시아 리얼리즘’전(10월10일까지)은 이제 숨을 고르고 지난 100여 년간 다른 갈래로 뻗쳐나갔던 아시아 근대 리얼리즘 미술의 역사와 인연을 찬찬히 살펴보자고 만든 전시다. 아시아 10개국(한국·중국·일본·싱가포르·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타이·베트남·필리핀·인도)의 근대미술 대표작 104점이 한자리에 내걸렸다. 각기 다른 자연·삶의 풍경들과, 나라의 독립과 평화, 민주화를 위한 지난한 싸움과 갈등의 단면들이 ‘리얼리즘’이란 한 이름 아래 모였다. 1910~20년대 한국 근대유화의 선구자 고희동과 김관호가 그린 자화상·누드 그림이 비슷한 시기 일본·베트남·필리핀 작가의 인물상과 함께 내걸린 모습은 복잡미묘한 감회를 일으킨다. 월북 작가 이쾌대의 해방 공간 작품 이 전후 독립운동을 벌이던 동남아 지역 미술인들의 전쟁·항쟁 그림과 마주 보고 있기도 하다. 물론 그린 사연은 각기 다르며, 내건 메시지나 기법 또한 각양각색이다. 분명한 건 무언가 서로 통하는, 끌림이 있다는 사실이다. 다기한 아시아 리얼리즘의 역사와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 근대미술 거장들의 계보를 처음 소개하는 이 전시의 의미는 가볍지 않다.
전시를 가르는 5가지 소주제(새로운 재현 형식, 향토, 노동자, 전쟁, 사회 인식과 비판)는 아시아 각 지역 리얼리즘이 양식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변화를 거듭한 인식과 태도임을 보여준다. 지역마다 작업의 편차가 있지만, 대체로 19세기 말 현실을 사진처럼 똑같이 재현하는 기술로서 사실주의를 수용한 것이 아시아 리얼리즘의 바탕이 되었다. 일본 근대회화의 비조라는 다카하시 요이치가 1872년 유곽 여자를 그린 이나 벨기에 화가에게 유화를 배운 19세기 인도네시아 화가 라덴 살레의 풍경화 를 보면 당대 서양 인물화, 낭만적 풍경화와 거의 다를 바 없다.
20세기 초 리얼리즘은 토착화의 시기였다. 각 나라의 전원 풍경에 천착해 민족성을 표출한 향토 화풍이 유행하며 그 반작용으로 나온 소외된 농민, 노동자 그림들도 등장한다. 2·3부는 이런 두 흐름에서 리얼리즘이 미친 현실 인식의 변화를 드러낸다. 필리핀 근대화풍의 대가인 아르모 솔로의 목가적 그림 와 인도네시아 미술운동을 주도한 수조 요노의 날선 노동자 그림, 인도 여성대가 암리타 세르길의 길거리 모자상 등에서 이런 대비적 양상을 읽을 수 있다. 수조 요노의 제자였던 트루부스의 는 거장 고야의 인물화를 떠올리게 한다. 전통 결혼식을 준비 중인 앳된 소녀와 그의 아래서 껍질을 깨고 나온 병아리의 모습 등을 담은 이 그림은 소박한 민중의 삶과 의식 세계를 아련하게 전해준다. 리얼리즘의 또 다른 모판은 근현대 전쟁. 4부는 한국전쟁·베트남전쟁 등을 다룬 대형 작품이 보인다. 베트남 작가 판 케 안의 은 미군 폭격 뒤 하노이 폐허 위에 선 철모 쓴 소녀 전사의 당찬 모습을 옻칠 화폭의 색다른 구성으로 부각시킨다.
1920~30년대 못지않게 중요한 기점이 민주화운동이 활발했던 1970~80년대다. 시기를 다룬 5부는 정치·경제적 갈등 등을 배경으로 극사실·초현실주의와 만나면서 더욱 풍성해진다. 1970~80년대 산업화 시기의 피폐해진 가족상을 그린 오윤의 작품과 노동자의 수난사를 담은 필리핀 작가 하불란의 , 참여작가 이종구씨가 쌀 포대 위에 그린 농촌 촌부의 극사실 그림과 저울에 목 매단 농부를 그린 타마삭의 초현실적 그림들은 서로 통하는 구석이 많다. 민중미술로 알려진 1980년대 한국 참여미술 운동 못지않게 1970년대 이래 동남아시아에서 비슷한 현실 참여 미술이 성행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인도네시아 작가 이반 사키토의 는 얼굴 없는 여성 3명의 실루엣을 통해 당대 화해할 수 없는 시대적 모순과 대면한 개인의 내면을 암시한다. 유령 같은 그들의 모습은 아시아 리얼리즘이 결국 틀지울 수 없는 복잡한 층위의 질문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럼에도 이처럼 각양각색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들이 기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리얼리즘 자체가 동시대를 살아온 아시아 사람들에게 현실과 소통하는 가장 유력한 공통 언어로 다가왔기 때문은 아닐까. 기획자인 김인혜 학예사는 말한다. “출품작마다 사연 없는 것들이 없어요. 그러니 복잡해지지요. 그림 속에 엉킨 역사적 맥락과 작가의 이야기를 찾아내는 재미가 각별한 전시입니다.”
아시아 미술사 갈무리할 기회
한국·싱가포르 대표 미술관이 손잡고 아시아 미술사를 갈무리한다는 취지의 이 전시 프로젝트는 2007년 ‘아시아 큐비즘’전에 이은 두 번째 공동 작업의 열매다. 지난 4월 싱가포르국립미술관에서 같은 제목의 첫 전시를 연 데 이어 서울에서 마련된 순회전이다. 전시 큐레이터와의 대화(7월23일, 9월24일, 10월1일), 사회·역사과 중등교사 워크숍(8월7일), ‘아시아 아방가르드’ 국제심포지엄(10월9일) 등 여러 딸림 행사들도 기다린다. 월요일 휴관. 문의 02-2022-0600. asia.moca.go.kr 참조.
노형석 기자 한겨레 문화부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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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5일 한겨레 그림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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