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볼 줄 안다고 자부하는 이들 중 코언 형제의 영화를 몇 편이라도 거친 이라면, 코언식 유머를 포착하고 바로 그 시점에 낄낄거리기는 어렵지 않다. 그건 할리우드의 주류 코미디를 보면서 웃을 때와는 다른 감흥일 텐데, 이를테면 ‘나는 코언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증표 같은 것이다.
코언의 세계? 그들은 놀라운 에너지로 장르를 변주하고 그 안에서 말이 안 되게 뒤죽박죽 서사를 질주시키는데도 늘 그게 한 편의 영화로서 말이 된다. 거기에 쾌감이 있다. 하지만 이는 말이 안 되는 지점들의 실마리가 결국 풀린다거나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그 이상한 지점들을 영화 혹은 우리가 그 자체로 끌어안을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해결되지 않은 지점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해결되지 않은 채로 끝내 남아야 코언 형제의 영화는 가능해진다.
그건 이들의 영화가 비밀을 품고 있다는 말과는 다르다. 비밀이란 진실이든 본질이든 언젠가는 밝혀지기를 기다리지만, 이들 영화에서 ‘해결되지 않는 지점’들은 밝혀져서는 안 된다. 누군가 그것의 정체를 은폐하기 때문이 아니라, 실은 그 안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애초 밝혀질 수 없다. 엄밀한 정의상으로는 비밀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 비밀처럼 존재함으로써 부조리의 코미디가 된다.
코언 형제의 분명한 재능은 서사를 과감하게 밀고 나아가면서도 문제의 해결은 점점 퇴행시키는 이 충돌이 언제나 영화적 흥미를 불러일으킨다는 데 있다. 이들 영화에 대한 영화광들의 매혹에는 고전 장르의 향수와 그것의 컬트적인 변주, 때로는 현대 미국 사회에 대한 영화적 코멘트가 주는 만족감 등이 뒤섞여 있을 것이다. 이들의 영화가 텅 빈 무언가를 붙잡고서도 서사를 밀고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줄 때, 그 빈 구멍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자꾸 생성되고 있음을 목격할 때, 거기서 순수한 영화적 쾌감이 발생한다. 그런데 자못 잔인한 진실은 이 영화적 쾌감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혹은 코언 형제의 불쾌감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인물들과 그들을 보는 우리가 세계 앞에 무기력해질수록 그 쾌감은 강렬해진다.
은 코언 형제의 영화들 중 걸작이라고 말하기도, 그들 특유의 화법에서 방향 전환을 한 이야기로 보기도 어렵지만, 앞서 언급한 생각들에 유달리 젖게 만드는 영화처럼 보인다. 래리(마이클 스터버그)는 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며 수학적 원리를 강조하는 중년의 유대계 남자다. 그러나 그의 삶을 지배하는 건 ‘불확실성의 원리’다. 아내는 자신의 친한 친구와 바람이 나서 이혼을 요구하고, 가족에게 무관심한 자식들은 아버지의 존재를 철저히 무시하며, 어딘지 허술한 형은 그에게 얹혀살면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킨다. 설상가상으로 학교에서는 종신교수 임용을 둘러싸고 래리에게 부정적인 소문이 나돈다. 한마디로 세상의 모든 불행은 그의 편이다. 그는 결국 자신의 비극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줄 세 명의 랍비를 찾아간다.
그러나 당연히, 그 누구도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종교적인 지혜는커녕 무책임한 반응으로 일관할 뿐이다. 엄격한 율법에 의존할 법한 유대계 가정의 면면은 알고 보니 그 어떤 가정보다 엉망이다. 이 영화의 코미디는 대개 그 불일치에서 나온다. 어쨌든 래리는 구원될 수 있을까? 아니, 그는 누구에게 구원을 요청해야 할까?
코언 형제를 잘 안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 알 수 있다(그러니 스포일러가 아니다!). 래리는 구원될 수 없다. 원래의 자리로도 돌아가지 못한다. 그는 일이 터질 때마다 반복적으로 “나는 (이런 불행을 야기할 만한) 아무 짓도 한 게 없다”고 말한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다. 그는 어느 관점에서 보아도 선량하고 성실하기 위해 노력하는 남자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므로 아무 일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믿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코언 형제의 세계는 그렇게 수학처럼 딱 떨어지듯 작동하지 않는다. 원인이 있고 행위가 있고 결과가 있는 그런 도식은 인물들의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혹은 원인도 행위도 부재한데 결과의 현상만 넘친다. 그때 우리에게 낯익은 관계, 익숙한 사물은 갑자기 친숙함을 상실하고 시공간으로부터 떨어져나온다. 래리가 “나는 악한 남자가 아니야”라며 자신의 순수함을 강조하자, 그의 동료는 “우린 도덕적인 잣대로 판단하지 않는다”라고 래리를 안심시키려 하는데, 이 말에는 코언 형제의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이 명징하게 담겨 있다. 그들의 세상을 움직이는 건 도덕이 아니다. 선과 악의 경계는 서사를 진행하는 뼈대가 될 수 없는 건 물론이고 세상을 지탱하는 기준도 아니다. 만큼 그걸 잘 보여주는 영화는 없다.
그런데 두 영화가 모두 원인의 불가능성을 말해도, 은 와 좀 달라 보인다. 가 도무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행위(폭력)의 궤적만으로 지탱되는 세계라면, 은 행위가 부재한 세계(다시 말하지만 래리는 스스로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라고 강변한다. 그것이 자신의 결백함에 대한 증거라고 믿는다)다. 주체가 세계와 맺는 관계가 과거와는 판이해진 현실 속에서 코언 형제는 납득할 수 없는 세상으로부터 주체가 스스로를 방어하는 두 가지 길을 열어두었다. 행위 자체만 남을 때까지 그 극단으로 치닫거나, 그 어떤 행위도 하지 않기. 행위 안에서 존재를 완전히 부수거나 최대한 행위를 존재 밖으로 밀어내기. 세계의 괴물성을 점점 더 극렬하게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둘 모두 끔찍하기는 마찬가지인데, 분명한 건 이것이 코언 형제가 이 세계 안에서 자신의 영화적 세계를 버텨내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이들 영화가 온갖 현란한 미로들로 우리를 현혹할지라도 그 끝에서 우리는 바로 이 두 개의 길에 갇혀버린 우리 자신과 맞닥뜨린다.
극단의 행위로 치닫거나, 아무런 행위도 안 하거나그런 맥락에서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의 결론은 코언 형제의 화법에 익숙한 자들에게도 심상치 않게 다가올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의 끝이 코언 형제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유독 무섭다. 그의 주인공들은 죽이는 자가 되거나 운이 좋으면 죽음을 피하는 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필연적인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주검을 보여주는 대신, 죽음 직전의 끔찍하고 무력한 기다림의 시간에서 끝내버리는 것. 어두운 토네이도가 다가오는 걸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도대체 이들의 다음 영화는 어디로 갈 것인가.
남다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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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3일 한겨레 그림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