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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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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 세대에의 도발, 그리고 개입

이단적 동양화가 정재호의 전시회 ‘Father’s day’…
과거 유물에의 연민·의심·증오가 동거하는 듯한 붓칠
등록 2009-10-23 17:56 수정 2020-05-03 04:25

아파트 단지의 쇠락을 파사드(정면) 형식 속에 반복하며 유명해진 정재호는 ‘동양화과 출신’ 작가다. 하지만 그를 정통 동양화론으로 풀이하자니 난처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화폭에 빼곡히 들어찬 아파트 정면상은 이른바 ‘허허로운 여백’을 완벽히 몰아냈고, 아크릴 물감 같은 양이(洋夷)의 화구까지 서슴없이 채용했다. 또 재현 대상조차 현실 속에 없는 기암괴벽이나 상투적 풍속 이미지를 버리고, 현대적 주거공간에 관한 건조한 기록을 기하학적 양식 습작인 양 옮겨놨다. 이렇게 동양화의 틀을 깨는 작가인 정재호의 전시 ‘Father’s day’가 10월6~25일 서울 갤리러현대 강남에서 열리고 있다.

〈International〉

〈International〉

동양화의 틀을 깨는 소재와 표현기법

전통 동양화·한국화론의 보수성에서 탈피해 현대화를 꾀한 작가의 계보 속에 정재호는 1990년대 후반 유독 과격한 변모를 시도했던 후대 작가군에 속한다. 이번 전시 제목은 우리말로 ‘아버지의 날’인데, 약술하면 그(1971년생)의 아버지 세대가 체험한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 기록사진들을 화폭 하나에 혼성 모방처럼 재편집한 것이다. 어디서 본 듯하나 낯설고 괴이한 인상(이른바 언캐니(uncanny) 하달까)을 그림이 풍기는 까닭이다. 때문에 ‘아버지의 날’은 전적으로 아버지 세대에 관한 기계적 재현이 아니며 아들 세대인 작가가 아버지 세대의 기록물에 손대고 가담할 자격에 관해 논하는 듯하다.

출품작 (사진)은 1985년 폐관한 서울 세종로의 단관극장 ‘국제극장’을 감쪽같이 편집한 작품이다. 아버지 세대의 유물()과 아들 세대의 기억( 간판)을 위아래로 나란히 걸어 과거사가 전적으로 전대의 전유물이기보다 후대의 해석 대상이기도 함을 주장한다. 성역이란 없다. 그림은 제목 을 중의적이고 유희적으로 풀이한다. ‘International’은 당시 극장 꼭대기에 세워진 영어 간판이지만, 건물 일부를 국제주의 건축 양식(International style)으로 각색하고 사회주의 국가의 유산인 확성기 기둥을 건물 앞에 삽입한 건 작가의 허구적 개입이다. 더구나 의도야 어떻건 필자에겐 작품 제목이 마치 좌파의 송가 (The Internationale)마저 연상시키니 과거사를 그저 냉전적 사고로 추억하려는 구세대의 고집에 동참할 수 없다는 선언 같기도 하다. 그래서 이는 반성된 과거다. 한편 건축물을 유형별로 반복하고, 기록사진을 수집해 재편집하는 작업 과정은 르포르타주(보고 문학)적이며 또한 뒤셀도르프 학파 사진가풍(특히 토마스 루프)과 닮아, 매우 당대적이고 전위적이다.

아버지의 날은 아버지 세대 전체를 넓게 지칭하지만, 좁혀보면 그가 사사한 선배 동양화단에 유비될 만하다. 정통 동양화단은 그와 후대 동양화가에게는 엄한 아버지의 상으로 기억될 터인데, 결국에 가선 극복의 대상이어야 마땅했다.

작가가 아파트를 반복해서 그린 점(아파트는 현대적 소재+그림은 철거 대상인 구시대 아파트), 이번 전시에 한국 근현대사의 기록사진을 택한 점(사진 출처는 구시대적+작위적 편집은 다분히 현대적)을 보건대, 정재호는 고색창연한 가치에 애착 어린 연민과 의심에 찬 증오를 모순적으로 품은 듯하다.

현대적 소재면서 철거 대상인 아파트에 천착

한지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써나간 편집된 과거는 아버지 세대를 향한 연민과 작가 자신의 자결권을 병렬적으로 담으려 한다. 장르적 사고로는 규정하기 힘든 그의 화면들은 지금 동시대 미술의 과도기적 현상까지 아우르고 있다.

P.S. 동양화·한국화라는 낡은 틀로 성격을 규정하면 출신 배경상 정재호를 이들 무리 속에 포함시키는 데 무리가 없다. 그러나 현재 그는 ‘회화과’에 재직 중이다.

반이정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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