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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의 중력과 차이의 디테일

홍상수 감독의 9번째 장편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영화감독을 주인공 삼아 자기반영적 특성 더해
등록 2009-05-07 17:08 수정 2020-05-03 04:25

홍상수 감독의 아홉 번째 장편영화 는 ‘홍상수 연속극’의 9회 같다. 예술가 주인공에 영화의 전·후반이 접히는 구조에 스멀스멀한 유머까지, 홍상수표 인장이 오롯하다. 영화의 줄거리도 남자가 어딘가 여행을 갔다가 뜻밖의 여성을 만나고 우연한 정사를 치르고 결국엔 도망치는 이야기다. 물론 뜻밖의 여성은 아는 이의 아는 이로, 아는 이가 좋아하는 여성이거나 남자 주인공이 옛날에 만났던 여성이다. 전국을 순례하는 홍상수의 영화 여행이 이번에 도착한 곳은 충북 제천과 제주도. 그래서 에 ‘홍상수 극장전 2009’라는 번호표나 ‘제천의 낮과 밤’ ‘제주도의 힘’ 같은 지역명이나 ‘제짝의 발견’ ‘또 해변의 그 여인’ 같은 부제를 붙여도 무리는 없겠다. 이렇게 영화 안에서의 반복을 넘어서는, 영화와 영화 사이의 반복은 홍상수 영화를 반길 이유와 반기지 않을 이유가 동시에 된다.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연히 여성을 만났다 헤어지는 구조는 여전

주인공 이름은 구경남(김태우). 홍상수의 전작에서 경수·성남·상원같이 있을 법한 이름을 얻었던 주인공은 이제 캐릭터에 가까운 이름으로 불린다. 어쩌면 이는 홍상수 영화의 변화가 반영된 것인데, 는 갈수록 간결하고 깊어지는, 게다가 유머까지 넘쳐나는 홍상수 영화의 현재다. 홍상수 감독이 요약한 줄거리를 다시 요약하면 이렇다. “구경남이란 남자가 제천시로 영화제 심사위원을 하러 갑니다. 후배 부상용(공형진)을 만나 술을 마시고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됩니다. 후배는 인생의 짝을 만나 새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한 2주일 지나선 제주도에서 특강을 하게 됩니다. 학교 대선배 양천수(문창길)를 만나 술을 마시고 그의 집에 가게 됩니다. 선배는 재혼을 했는데 결혼한 여자가 옛날에 구경남이 구혼했다 거절당한 여자 고순(고현정)입니다. 대선배도 이 여자와 새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역시나 홍상수 감독은 반복과 차이를 통해 대구를 만든다. 그리고 영화에서 얼핏얼핏 보이는 반복의 중력과 차이의 디테일로 인간이란 존재를 해부한다. 영화 소개에 감독이 덧붙인 한마디, “제천과 제주도에서 구경남에게 비슷한 일이 일어나긴 하는데, 그 안을 쳐다보면 다른 면도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영화는 접힌 구조로 “무언가 비스듬히 겹쳐져” 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슷한 일 가운데 다른 면도 있다는 것이다. 는 ‘인생의 짝’을 만나서 ‘새 삶’을 얻었다고 말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면에서 전작과 다르다. 홍상수의 인물들은 대개 짝이 없거나 짝이 있어도 제짝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헤매는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그의 영화에 제짝을 만나서 새 삶을 산다는 담대한 주장을 하는 인물들이 등장했다! 지금껏 무언가를 찾던 인물에서 찾았다고 주장하는 인물로 바뀌는 심대한 변화다. 그리고 구경남은 제천에서 이런 인물들을 구경하며 비웃다가 제주에서 비슷한 인물들을 만나서 매달린다. 비웃던 말을 그대로 뱉으며, “당신이 내 짝”이라고, “새 삶을 살자”고.

그러나 홍상수의 세계는 여전히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사건은 생략되고 말들만 오간다. 구경남이 제천에서 부상용의 부인 유신(정유미)을 성폭행했는지 모호하고, 제주에서 구경남을 방으로 끌어들이는 선배 양천수의 부인 고순의 진심도 애매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니 여기에 진실 따위는 없다. 역지사지는 사전에나 나오는 말이다. 홍상수의 전작처럼 여기서도 인간은 역시나 자기중심적이고 자가당착적이다. 내 속엔 내가 너무나 많아, 자신도 헛갈리는 인물들. 제천영화제 프로그래머 공현희(엄지원)가 구경남에게 쏘아붙이는 독백처럼 “내가 강간당한 건 다 너 때문이야”라는 타인을 원망하는 마음과 “나도 끝까지 못 버틴 거 같애”라는 자책이 하나의 사건에 겹치는 것이 다반사다. 이렇게 홍상수 감독의 영화로 탐구하는 ‘인간-동물학’은 여전하다. 자신의 처지인지도 모르면서 남의 얘기랍시고 떠드는 말들, 어제 비웃었던 남의 얘기를 오늘은 나의 진심을 담아서 하는 말들, 사소한 계기로 틀어져 “잘 알지도 못하면서 ××놈아” 하면 “내가 모르긴 뭘 몰라” 하면서 핏대를 세우는 인간들, 남자란 동물이란 사실을 불쑥 깨닫게 만드는 팔씨름 장면들, 이렇게 문장으로 옮기면 웃음기를 잃지만 영화 속에선 박장대소가 터지는 장면들이 영화에 가득하다. 이렇게 너에게 반응하고 남에게 질투하지만, 나조차 모르는 인간에 대한 홍상수의 아홉 번째 리포트로 는 수작이다. 늙거나 젊거나, 제짝을 만났거나 아니거나, 인간이 얼마나 애처로운 기계인지 우리의 뒤통수는 얼마나 서글픈지 영화는 웃으며 반추하게 한다.

는 홍상수 영화의 자기반영적 혹은 자기해명적 특성이 한 걸음 나아간 영화다. 이번엔 질문과 대답의 형식을 빌린 보다 노골적인 대사들이 나온다. 영화감독 구경남의 강의를 듣던 학생이 묻는다. “왜 이런 영화를 만드세요? 사람들이 이해도 못할?” 이것을 비롯한 몇 장면에서 구경남은 발견하는 과정으로서의 예술론, 살면서 자유가 가장 소중하다는 인생론, 단지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할 따름이란 존재론 등을 펼친다. 에서 중래(김승우)가 동원했던 복잡한 수식을 통한 설명도 아니다. 이렇게 관객이 화자로 느끼는 감독이 자신도 비웃는 기운이 강해지면서 영화는 마치 감독의 슬랩스틱코미디를 보듯이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김태우는 홍상수 감독의 100%짜리 페르소나

이제 김태우는 홍상수 감독의 싱크로율 100%의 페르소나로 보인다. 김태우는 구부정한 어깨로 등장해서 설렁설렁 술자리만 찾아다니다 결국엔 누군가에 빠져서 안달하는 구경남을 기막히게 연기한다. 김태우는 의 김상경만큼 찌질해 보이고, 엄지원은 의 예지원보다 웃기다. 새침한 표정으로 불쑥불쑥 지나치게 솔직한 대사를 내뱉는 엄지원의 열연은 눈부시다. 여기에 홍상수 사단의 일원인 고현정, 신인인 하정우도 홍상수 영화에서만 가능한 연기를 해냈다. 에는 “니들이 고생이 참 많다”처럼 일상에서 요긴하게 써먹을 유행어 같은 대사가 참 많다. 홍상수의 영화는 현실이 아니면서 이렇게 현실에서 따라하게 만드는, 현실 같은 힘으로 넘치는 ‘덩어리’다. 5월14일 개봉한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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