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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을 거부하는 조폭 사극

여균동 감독의 <1724 기방난동사건>… <비단구두> 주인공이었던 감독의 변심일까
등록 2008-11-28 17:26 수정 2020-05-03 04:25

의 언론시사회가 열리던 날, 여균동 감독과 배우들은 이 작품이 “아무 생각 없는 영화”임을 누차 강조했다. 아니, 이런 심한 말을! 이 어려운 시기에 오랜 시간 땀을 흘려 만든 자신들의 작품을 부정하는 말은 설마 아닐 테고, 영화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일종의 전략적 요구 같았다. 이 영화의 유일한 임무는 오락에 철저히 복무하는 것이니 영화에 대해 가능한 반응은 재미있거나, 재미없거나, 단 두 가지뿐이라는 주장 말이다. 여기에는 비평에 대한 거부, 다시 말해 영화에 대한 미학적·윤리적 판단을 원천봉쇄하는 강력한 명령이 있다. 영화가 더 이상 삶의 연장선상에서, 혹은 삶 한가운데서 읽혀지기를 포기하는 세상을 살면서 “아무 생각 없는 영화”라는 말에 새삼 상처 입는 건 어쩌면 우스운 일인지도 모른다.

<1724 기방난동사건>의 출연진은 이 영화를 즐거운 오락물로 보아달라고 부탁했다. 이 영화에서 배우 이정재는 동네 싸움꾼 천둥의 역할을 맡았다.

<1724 기방난동사건>의 출연진은 이 영화를 즐거운 오락물로 보아달라고 부탁했다. 이 영화에서 배우 이정재는 동네 싸움꾼 천둥의 역할을 맡았다.

현실에 출구가 없을 때, 영화에서 그 암담함을 일시적으로나마 망각하려는 욕망이 나쁘다고 말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는 영화’가 ‘아무 생각 없는 관객’을 만나 ‘아무 생각 없이’ 소비될 때(아마도 이것은 ‘아무 생각 없는 영화’가 갈 수 있는 혹은 바라는 최선의 길이지 않을까), 그래서 이들 사이에 결국 남는 것이 오직 7천원의 티켓값뿐일 때, 이런 상황을 근심한다면 과도한 반응일까. 영화에 대한 근심 어린 비평이 엘리트주의의 권위의식과 동일시되는 시대에, 감독과 배우들의 위와 같은 말은 오늘날의 대중에게 던지는 달콤한 유혹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 생각 없는 영화’라는 말의 이면에는 좀 이상한 말이지만, ‘아무 생각이 없지 않다’.

생각없는 영화가 생각없이 소비될 때

은 등의 연출자로, 또한 개성 있는 배우로 우리에게 알려진 여균동 감독의 신작이다. 제목처럼 배경은 1724년 조선이다. 기방 명월향에 아름다운 기생 설지(김옥빈)가 들어오자 첫눈에 그녀에게 빠져버린 건달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동네의 싸움꾼 천둥(이정재)이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명월향의 주인인 만득(김석훈)이라는 만만치 않은 상대가 있다. 때마침 천둥의 주막에 조선 주먹계의 명가 양주파 두목인 짝귀가 찾아오고 천둥은 우연히 그를 쓰러뜨린다. 천둥은 졸지에 양주파의 우두머리가 되어 반대파인 만득의 야봉파와 대립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조선으로 시공간을 옮긴 조폭 영화다. 막간의 로맨스와 조폭 집단 내부의 코믹한 설정, 느닷없이 찾아온 심각한 의리의 맹세, 유혈 낭자한 싸움신까지 사극이라는 점을 제외하고 특별할 것은 없다. 영화 스스로 특정 장면들을 기존 조폭물에 대한 패러디로 설정한 듯한 인상도 더러 주지만, 사실 그런 장면들조차 조폭물의 도식을 그대로 따라간다. 이미 너무 많이 보았던 것들, 한때의 유행이던 장르와 소재들이 뒤섞였기 때문에 천둥과 설지의 로맨스나 만득과 천둥의 대결 구도 등 영화의 기둥이 될 법한 이야기들은 애초 이 영화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 같다. 이야기만 따라가다 보면 종종 납득할 수 없는 실소의 순간들도 있다. 어차피 이 영화가 추구하는 재미있는 이야기의 허술함을 잊게 만드는 기술적 효과들일 텐데, 인물들의 표정이나 몸짓을 과장되게 전시하는 카메라워크와 컴퓨터그래픽(CG), 인물들의 감정을 희화화하는 과잉된 음악이 반복될수록 시각적 쾌감은 오히려 무뎌진다.

아름다운 허구에 대한 열정은 어디로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은 다른 걸 다 떠나 재미의 차원에서조차 동의할 수 없는 작품이다. 차라리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동안 감독의 전작인 (2005)를 떠올리고 있었다. 는 저예산으로 제작돼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나온 영화로 스태프들 임금 체불 문제나, 먼저 개봉된 과의 유사성 때문에 영화 외적으로만 회자되다 잊혀진 작품이다. 여기에는 여균동 감독의 영화에 줄곧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실패한 감독(극중 이름은 만수)이 있다. 뜬금없이 사채업자에게 불려간 그는 사채업자로부터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아버지를 개마고원에 데려다주라는 명령을 받는다. 영화감독은 뭐든 할 수 있는 직업이니, 세트를 만들어서 자신의 아버지를 속여달라는 것이다. 흥행에 실패하고 세상에 울분이 쌓여 다른 나라로 도망칠 궁리를 하던 만수는 이 일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처음에는 사채업자의 위협 때문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인에게 동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만의 영화를 찍는 대신, 어느 실향민을 위해 현실 속에 허구로 된 한 세계를 짓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물론 변한 것은 없다. 그는 여전히 흥행에 실패한 영화감독이며 그가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기약도 없다. 하지만 만수는 허구를 외롭고 힘겨운 삶 한가운데로 끌고 와서 허구가 현실 속에서 확장되고 열리는 순간, 달리 표현하면 ‘영화’의 아름다운 찰나를 경험한다. 가 개봉 당시 작품성 측면에서 평단의 환대를 받지는 못했지만 그 순간의 이야기는 충분히 마음을 움직일 만한 것이었다. 을 보면서 내가 생각한 건, 그때보다 더 나빠진 우리의 세상, 그리고 바로 그 감독 만수의 변심이다.

남다은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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