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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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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

스티븐 워커 감독의 ‘로큰롤을 부르는 실버밴드’ 다큐멘터리 영화 <로큰롤 인생>
등록 2008-11-21 19:13 수정 2020-05-03 04:25

먼저 고백부터 하자. 로큰롤을 하는 실버밴드가 있다는 아내의 말에 반신반의했다던 스티븐 워커 감독처럼 나도 그랬다. 지금 인기가 한창인 밴드 콜드플레이의 (Fix You)를 부르는 평균 연령 80살 노인들의 이야기라면, 뭔가 속임수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사회장 앞에 선 나는 벌써부터 이 영화에 대해 ‘은퇴 뒤의 안락한 삶을 보내던 중산층 노인들의 여가생활’ 혹은 ‘로큰롤은 젊음의 음악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위해 편집된 다큐멘터리’ 정도라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된 지 10여 분도 지나지 않아 나는 무너졌다. 아이고, 이 노친네들 앞에선 그 어떤 비평적 관점도, 태도도 소용없었다. 그들이 누구든, 무엇이든 혹은 어디에 있든 간에 이 영화는 어떤 진정성을 전달한다. 진정성이라는 말을 함부로 남발하는 건 아니다. 그건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지독하게 사적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누구도 삶과 죽음 앞에서는 결코 객관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병들고 다투고 심지어 죽어도, 그들의 연주는 계속된다. 영원히 젊은(forever young) 할머니·할아버지 밴드의 로큰롤은 끝나지 않는다.

병들고 다투고 심지어 죽어도, 그들의 연주는 계속된다. 영원히 젊은(forever young) 할머니·할아버지 밴드의 로큰롤은 끝나지 않는다.

중환자실에서도 노래하는 노인들

스티븐 워커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영화 (원제: Young@Heart)은 73살부터 93살까지 미국 노스햄턴 출신의 노인들로 구성된 ‘영@하트’(Young@Heart)라는 코러스 밴드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밥 딜런과 클래시, 데이비드 보위와 콜드플레이의 히트곡들을 노래하며 유럽과 미국 전역에서 순회공연을 벌였다. 하지만 이들이 처음부터 로큰롤을 부른 건 아니다. 밴드가 처음 결성된 1982년에는 그저 동네 노인들의 사소한 노래 모임이었다. 나이에 걸맞게 클래시컬 음악과 TV의 오페라 프로그램을 좋아하던 그들이 변한 건 ‘릴’이라는 멤버 때문이었다. 어느 날 그는 무대에서 무심하게 맨프레드 맨의 (Doo Wah Diddy)를 불렀고 관객은 열광했다. 그날 이후 멤버 중에서 가장 젊은 밥 실먼 단장의 지휘 아래 영@하트는 ‘로큰롤을 부르는 실버밴드’로 거듭났고 1996년에는 유럽 12개국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를 순회하며 공연을 선보였다. 영화 이 시작되는 시점은 부활절 연휴를 몇 주 앞둔 2006년 중반이다. 촉망받는 다큐멘터리 감독인 스티븐 워커는 아내에게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연을 본 뒤, 카메라를 들고 미국으로 떠났다.

섹스 피스톨스의 저 유명한 음반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의 표지를 연상시키는 오프닝으로 시작된 영화는 부활절 이후 ‘얼라이브 앤드 웰’(Alive and Well)이라는 공연을 준비하며 신곡 연습에 여념이 없는 노인들의 모습과 그들의 일상을 뒤쫓는다. 제임스 브라운의 (I Got You)와 소닉 유스의 (Schizophrenia), 그리고 토킹 헤즈의 (Life During Wartime), 앨런 투세인트의 (Yes We Can Can) 등 신곡을 연습하는 할아버지·할머니들의 실패와 좌절, 그리고 그걸 극복하려는 의지가 카메라에 담긴다. 스크린은 활기차다. 암세포에 점령당하고 척추에 이상이 생기고 폐에 물이 차는 늙은 육신과는 무관하게 살아 있는 것 자체를 즐기는 일상은 유쾌하고 유머러스하다. 이를테면 그들은 죽음에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노래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사실 그들이 부르는 노래의 장르가 로큰롤이든 클래시컬 음악이든 전혀 중요한 게 아니다. 뭔가를 계속 해나간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살아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 중요한 의미인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을 보며 무너진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가 마케팅이나 흥행 성적과는 별개로 강렬한 진정성을 획득하는 이유다.

사실 이제 겨우 서른 몇 해 정도를 살아온 자로서는 80여 년을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어떤 식으로든 언급할 깜냥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건 이해 이전의 문제다. 그 시간을 온전히 살아온 사람들만이 과거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중환자실과 신장결석과 ‘마지막 순간에 본다던 하얀 빛’에 대해 농담을 건네는 걸 보면서 ‘죽음조차도 농담이 되는 삶’이라고 툭, 말해버릴 순 없다. 그건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끼어들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죽음이 늘 그들 곁에 머물러도 언제나 두렵다는 건 변함없으리라는 사실만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다. 그래서 그런 농담을 사사로이 나누면서도 며칠 전 멀쩡하게 함께 노래를 연습하던 멤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일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그들의 모습은 그저 먹먹하게 전달될 뿐이다. 우리보다 죽음에 더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죽음이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얼마나 잔인한 편견인가. 그래서 그들은 병자성사를 받은 직후에도 중환자실에 누워 노래를 부른다. 당장 면역력이 약해져 백혈구를 수혈받으면서도 몇 주 뒤의 공연을 걱정한다. 공연 날 아침 멤버의 죽음을 전달받고도 예정된 공연을 끝까지 해낸다. 그들의 삶이 증거하는 진정성은 거기에 있다. 먼저 떠난 멤버에게 밥 딜런의 (Forever Young)을 바치는 그 순간을 어떻게 글로 설명할 수 있을까. 영화는 ‘로큰롤을 부르는 실버밴드’를 죽음과 삶의 비장한 순간의 아름다움으로 감싼다. 은 그런 삶의 의지를 오롯이 전달하는 영화다.

먼저 떠난 멤버에게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마침내 자기 삶의 의미를 온전히 부여할 만한 뭔가 하나쯤 찾기 마련이다. 영@하트 멤버들에게는 그게 노래였을 것이다. 아마도 삶은 그때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그걸 보면서 ‘중산층 노인들의 안락한 여가생활’쯤이라고 생각한 게 좀 부끄러워진다. 물론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임에도 수록곡과 뮤직비디오가 삽입돼 감독이 직접적으로 개입한다. 밴드가 한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점에서, 내부에서도 인종과 계층과 다양한 이해관계가 엮인 갈등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이 커뮤니티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늘상 존재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가장 평등한 곳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들의 유일한 동기가 삶 자체라는 건 압도적이리만치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

2시간 정도 이 노인네들과 함께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는 내내 떠오른 건, 유치하게도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 같다. 물론 5살짜리 꼬마가 이천희에게 평생자산관리를 권하는 방송 광고가 나오는 이 땅에서라면, 영@하트의 멤버들 같은 노년을 꿈꾸는 건 ‘희망사항’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처럼 늙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우진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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