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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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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성 천희’가 대세

‘리얼’의 강박을 벗어난 버라이어티쇼의 선택, 도도한 스타를 흙바닥에 굴리라
등록 2008-11-21 19:09 수정 2020-05-03 04:25
잘생긴 ‘천희’(위)와 왕년의 국민 여동생이었던 임예진이 엉성하게 망가지는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일종의 위로를 얻고 쾌감을 느낀다.

잘생긴 ‘천희’(위)와 왕년의 국민 여동생이었던 임예진이 엉성하게 망가지는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일종의 위로를 얻고 쾌감을 느낀다.

김구라는 문화방송 ‘세바퀴’의 진행자다. 하지만 그는 ‘세바퀴’에서 좀처럼 트레이드마크인 독설을 하지 않는다. 그저 한두 마디 거들듯 독설을 할 뿐이다. ‘세바퀴’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김구라가 아니라 멀쩡한 외모의 몇몇 여성 게스트들이다. 탤런트 이승신은 엉뚱한 대답을 늘어놓는 ‘4차원 주부’가 됐고, 방송인 한성주는 이휘재에게 끈질기게 대시하는 푼수기 다분한 여자가 됐다. 가장 극적인 변신은 임예진이다. 1970년대의 국민요정이었던 그는 ‘세바퀴’에서 모든 출연자에게 놀림을 받는 ‘백치미’ 캐릭터가 됐다. 독설은 줄어들고, 멀쩡한 외모로 엉성한 모습을 보여주는 캐릭터들은 늘어난다.

김구라는 사과, ‘악마’는 ‘하찮은 형’

김구라는 인터넷에서 인신공격을 퍼부었던 연예인들을 찾아다니며 사과하고, 한때 ‘악마’였던 박명수는 여기저기서 놀림받는 ‘하찮은 형’이 됐다. 이천희는 SBS 의 ‘패밀리가 떴다’에서 ‘엉성 천희’가 됐고, 이효리는 ‘유고걸’이 아니라 나이 서른의 ‘육오(6X5)걸’이 돼 유재석과 온갖 해프닝을 일으킨다. 의 ‘골드미스가 간다’에서는 드라마 속에서 도회적인 이미지의 캐릭터를 주로 연기했던 양정아가 서른여덟의 나이를 탓하며 만사 귀찮아하는 푼수 맏언니가 됐다. 엉성한 캐릭터들의 등장은 조금씩 ‘리얼’의 강박을 벗어나는 최근 버라이어티쇼의 흐름을 보여준다.

독설은 오락 프로그램 안으로 리얼리티를 끌어들이는 수단이다. 독설 캐릭터들이 연예인들을 실명으로 거론하며 비난할 때, 쇼와 현실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이는 뚜렷한 갈등을 찾기 어려운 오락 프로그램에서 갈등의 구심점이 될 수 있었다. 반면 엉성한 캐릭터는 그 자체로 판타지에 가깝다. 이천희가 리얼리티쇼보다는 시트콤 같은 상황극의 요소가 많은 ‘패밀리가 떴다’를 통해 인기를 얻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패밀리가 떴다’는 ‘1박 2일’처럼 여행을 소재로 했지만, ‘1박 2일’처럼 현실적인 고생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행비나 먹을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패밀리가 떴다’는 모든 것이 풍족한 ‘걱정 없는 세계’다.

출연자들은 이 ‘걱정 없는 세계’에서 한없이 망가진다. 트렌드세터인 이효리가 ‘패밀리가 떴다’에서 몸뻬바지를 입고 논밭 위를 구르는 모습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구경거리다. ‘리얼’과 ‘야생’을 표방하는 한국방송 의 ‘1박 2일’ 역시 ‘허당’ 이승기와 ‘초딩’ 은지원이 엉성한 캐릭터의 역할을 했고, 최근에는 출연자들이 저예산 뮤직비디오 촬영 등을 통해 엉성한 연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세바퀴’와 ‘골드미스가 간다’ 역시 주부와 미혼여성의 현실을 바탕으로 하지만, 프로그램의 대부분은 즐거운 게임과 수다로 채워진다. 독설을 앞세운 리얼리티쇼가 오락 프로그램 안에 현실의 걱정거리까지 끌고 들어오면서 긴장감을 일으켰다면, ‘패밀리가 떴다’ 같은 프로그램들은 ‘걱정 없는 세계’ 안에서 좀더 편안한 웃음을 만들어낸다.

리얼리티쇼, 혹은 독설 특유의 ‘독기’에 지친 시청자가 걱정거리 없이 볼 수 있는 쇼를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걱정 없는 웃음을 일으키는 방식은 힘이 빠진 독설가들의 독설보다 오히려 전복적이다.

독설가들의 개그는 그들이 ‘언더도그’일 때 빛난다. 박명수도, 김구라도, 의 ‘왕비호’로 출연하는 윤형빈도 모두 처음에는 무명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독설을 선택했다. 그들은 방송에서 자신들의 생활고를 호소했고, 그 처지를 무기 삼아 누구든 비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박명수는 여러 오락 프로그램의 고정 패널이고, 김구라는 인터넷 시절 그가 욕하던 연예인들을 찾아다니며 사과하기 바쁘다. 윤형빈은 지난 11월9일 의 관객석에 앉은 나무자전거에게 ‘굳이’ 독설을 날려 그들을 실시간 검색어 1위로 만들었다.

약해진 독설대신 망가짐으로 ‘전복’

이미 스타가 된 독설가들이 여전히 독설의 쾌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연예인들과 불화를 겪거나, 더 센 상대에게 독설을 퍼부을 각오를 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어지간한 정치 풍자도 쉽지 않은 곳이다. 이런 상황에서 독설가들은 방송 출연 횟수가 늘어날수록 독설을 줄인다. 독설가가 독설 대상들과 웃으며 어깨동무를 하는 순간, 시청자는 ‘진짜’ 같던 독설이 엔터테인먼트의 일부분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반대로 멋진 외모의 출연자들이 보여주는 엉성한 캐릭터는 그 자체로는 콘셉트일 수도 있지만, 평소 멋진 외모를 빛내던 그들이 이미지 변화를 감수하고 웃음을 주는 것만큼은 진짜다.

독설이 더 이상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욕하는 전복의 재미를 주지 못하는 사이, 엉성한 캐릭터들은 잘난 사람도 오락 프로그램에서 망가질 수 있다는 정반대의 전복을 보여준다. ‘패밀리가 떴다’에서 처음에는 멋진 남자로 치켜세워지던 김종국이 서서히 망가지는 과정은 스타들이 요즘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는 방식을 보여준다. 멋진 이미지의 톱스타일수록 대중 앞에서 망가지는 것이 대중을 만족시킨다. 멋지기만 했던 스타는 독설가의 독설을 받으며 흔들렸고, 이제는 스스로 대중에게 다가선다. 그리고 대중은 약해진 독설가의 독설 대신 자신들을 웃기기 위해 흙바닥에 구르는 기존 스타들의 변신에 즐거워한다. 도도한 외모의 스타들은 땅에 내려오면서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

독설의 힘이 빠진 독설가들은 어떻게 자신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을까. 더 센 독설을 들고 나올까, 아니면 자신들이 비난하던 ‘스타’들의 길을 따라가려고 노력할까.

강명석 기자 10-maga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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