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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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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에 천사가 있었는가

원래는 한 편의 영화로 기획됐던 장률 감독의 <중경>과 <이리>
등록 2008-11-13 17:18 수정 2020-05-03 04:25

장률의 과 (사진)는 원래 한 편의 영화로 기획되었다. 하지만 중경에서 먼저 찍은 분량이 이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이후 전북 익산에서 촬영한 부분이 라는 제목의 영화로 나뉘었다. 결과적으로 독립된 두 편의 영화지만, 이들은 함께 짝을 지어 생각할 때 울림이 깊어지는 영화들이다. 장률의 영화가 단 한 번도 보는 이의 마음을 편하게 만든 적은 없으나 과 는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아프고 힘겹다. 개인적으로 장률의 전작인 과 를 진심으로 좋아하지만, 과 에는 종종 동의할 수 없는 지점들이 있다. 그럼에도 장률의 영화는 여전히 보고 난 뒤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만 마음으로 돌아오는 이미지이고 소리이며 황폐와 절망의 끝에서 건져올린 어떤 기이한 순간들의 세계다. 장률의 카메라는 여전히 움직이는 대신 한자리에 서서 집요하게 기다리길 택하고 ,인물들은 무심히 프레임 밖으로 사라졌다가 돌아온다.

<이리>

<이리>

폭발사고 후유증 안고 태어난 아이

장률의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서 있는 땅의 온전한 주인이 되지 못하고 쓰레기처럼 버려지거나 부유하는 이방인들이다. 에는 중국에 사는 가난한 조선족 여인이 있었고, 에는 몽골의 어느 사막에 잠시 머무르는 탈북자 모자가 있었다. 과 역시 마찬가지다. 두 도시가 공유하는 건 1977년 11월11일 이리역에서 일어났던 폭발사고, 정확히 말하자면 폭발이라는 모티브다. 전혀 다른 시공간처럼 보이지만 두 도시의 욕망이나 정서, 그 안의 삶은 운명처럼 이어져 있다. 에는 외국인들에게 베이징어를 가르치는 여인 쑤이(궈커위)가 있다. 쑤이는 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는데, 매춘부를 집으로 불러들이던 아버지가 공안원에게 잡혀간다. 공안원은 아버지를 풀어주고 쑤이를 유혹한다. 쑤이도 그에게 몸과 마음을 허락하지만 곧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의 총을 훔친다. 여기에 또 한 명의 주목할 만한 남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쑤이의 한국인 학생 김씨다. 김씨는 이리역 폭발사고 때문에 다리와 성기능을 잃었고 중경에서도 행복하지 않자 몽골로 떠나겠다고 말한다.

(장률은 를 먼저 보는 게 맞다고 말한 적이 있다)는 사고가 일어난 지 30여 년이 흐른 뒤, 이제는 익산으로 명칭이 바뀐 도시와 거기 사는 어느 불행한 남매를 바라본다. 여동생 진서(윤진서)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이리역 폭발사고를 경험했고 그 일로 인해 정신이 온전하지 않다. 그녀는 경로당에서 노인들의 뒤치다꺼리를 도맡고 중국어학원에서 몇 달째 월급도 못 받고 일한다. 동네 남자들은 그런 그녀를 수없이 범하고 그럴 때마다 그녀를 병원에 데리고 가는 사람은 택시운전을 하는 오빠 태웅(엄태웅)이다. 그에게 진서는 불쌍하지만 삶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존재다. 영화의 마지막에 에서 보았던 쑤이가 중국어학원의 새로운 강사로 익산에 도착한다.

대사가 많지 않지만 두 영화에는 수많은 언어가 존재한다. 에서 쑤이는 베이징어를 가르치고, 에서 진서는 학원 청소를 하며 어깨너머로 중국어를 배우고 따라한다. 그녀가 거울을 보며 소리 없이 중얼거리는 장면도 있다. 하춘화의 노래는 두 영화에 모두 등장하며, 의 가장 아름다운 두 장면은 말 대신 노래가 흐를 때다. 하나는 진서의 동네 친구인 외국인 노동자가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자기 나라 노래를 고요하게 부를 때고, 다른 하나는 실로 오랜만에 재회한 두 노인 남녀 앞으로 할머니들이 장구를 치며 을 부르고 지나갈 때다. 타자에게 도달하는 소통의 언어가 아니라 공중으로 흩어져서 영화 속 세계에 비처럼 내리는 언어. 그것은 인간들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그 대화의 불가능성을 허망하고 슬프게 쏟아내는 언어다.

죽음처럼 살 지언정, 죽지는 않아

사실 장률의 그러한 세계가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그가 인간의 성적 욕망을 보여줄 때다. 과 에서 섹스는 생의 벼랑 끝에서 토해내는 몸의 절박한 아우성 같은 것이었다. 거기에는 아무런 환상도 개입할 여지가 없었고, 그 어떤 우회로도 없어서 오히려 초현실적이고 괴이한 느낌을 자아냈다. 과 에서 역시 그러하지만, 이 영화들에서 성적 욕망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착취와 폭력의 구조 속으로 들어간다. 섹스는 점점 더 추악해지고, 아니 정확히 말해 폭력과 동일한 말이 된다. 뒤틀린 욕망의 분출만 있을 뿐, 단 한순간의 교감도 없다. 그럴 때마다 영화 속 세계의 시간은 쇠락한 도시의 풍경 앞에서, 벌거벗은 인간의 생경한 몸 앞에서, 겁탈당한 여자의 몸 밖으로 나오는 구역질 소리 앞에서 멈춰버린다.

장률의 영화들에서 언제나 눈여겨봐야 할 것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여자들의 모습 혹은 선택이라고 생각해왔다. 은 여인이 결국 세상에 복수를 마치고 무언가에 떠밀리듯 앞으로 나아가며 끝났다. 그건 죽음이나 체념 같았다. 의 여인은 몽골을 떠나 어딘가로 향하는데, 때와 달리 그 움직임에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의 마지막에는 그런 결단이나 선택의 움직임 같은 것이 없고, 에 이르면 죽음도 의지도 체념도 아닌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있다. 영화 말미에 태웅은 진서를 바다에 익사시키려고 한다. 그녀의 죽음에 확신이 드는 찰나, 그녀는 물기를 머금은 채 마을 어귀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앉아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자기 이름을 중국어로 말하고 있다. 그녀는 죽어서도 기어이 돌아온 유령일까. 죽을 수 없는 천사일까. 장률과 윤진서는 그녀를 천사라고 표현했으니 아마도 그녀는 죽음처럼 살지언정, 죽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30년 전 그녀는 이미 죽은 건지도 모른다. 장률 영화들 속 여자들 중에서 진서는 가장 희생적이고 폭력에 대한 저항이나 방어를 할 능력이 없는 착취의 대상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종잇장처럼 얇아지는 캐릭터다. 여기서 문제는 임신과 낙태, 강간 등을 영화에 넣어서가 아니라, 그걸 다른 무엇을 말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할 때 빠질 수밖에 없는 한계에서 이 영화가 얼마나 자유롭냐는 것이다. 또한 그녀가 장률의 말처럼 천사일 때, 이 천사를 조금이라도 숭고하게 그리려는 유혹에 빠지는 순간, 는 위험한 영화가 되어버린다. 장률은 그렇게 했는가? 안타깝게도 종종 그런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결말에는 확실히 현실과 초현실이 겹쳐지는 순간의 이상한 아름다움과 꿋꿋함이 있다. 나는 정말 이 장면이 곤혹스럽다.

남다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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