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보다 많았던 여름 록 페스티벌의 시즌이 지나간 뒤 가을이 왔다. 지루하게 이어진 여름 날씨가 단숨에 서늘해지자마자 또 페스티벌 시즌이 시작됐다. 연중 마지막으로 야외에서 공연을 즐길 수 있는 10월이 온 것이다. 2006년 펜타포트 이후에야 여름 록 페스티벌의 참맛을 느낄 수 있었다면, 가을은 꽤 오랫동안 페스티벌의 계절이었다.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이하 쌈사페)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9년 서울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크래시와 크라잉넛 등을 헤드라이너로 열렸던 쌈사페는 올해로 열 살을 맞았다. 그 시간 동안 조금씩 모양새를 바꿔왔다. 처음에는 무료로 시작했지만 조금씩 입장료를 받아왔다. 1천원으로 출발해서 올해는 1만원이 됐다. 참가하는 팀들도 조금씩 늘어왔다. 처음에는 100% 인디밴드로 시작했지만 이듬해 허니패밀리의 참가를 시작으로 산울림, 싸이, 인순이, 심수봉 등 참가자의 면면도 넓어져왔다.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회를 거듭하며 외형과 내형을 프레스코화 그리듯 구축해온 쌈사페의 지금 이미지는 그래서 단순히 록 페스티벌이라 할 수는 없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자신의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의 축제다. 굳이 말하자면 리얼 뮤직 페스티벌이랄까. 꽤 오랫동안 한국 음악 소비 문화 한켠에 자리잡고 있던 메이저와 인디, 장르와 장르 간의 배척 관계를 깨왔던 것이다.
빅뱅을 록 페스티벌 무대에 올린 것도 쌈사페만이 할 수 있는 파격이었고 이승환이 본격적으로 인디 뮤지션들과 교류하며 한 무대에 서기 시작한 것도 쌈사페에 참가한 이후의 일이다.
그런 면모는 10주년을 맞은 올해 더욱 두드러진다. 갤럭시 익스프레스, 검엑스,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등 현재 한국 음악계의 ‘뜨거운 감자’들이 참가하는 건 물론이고 노브레인, 크라잉넛 등 쌈사페와 함께 성장해온 록스타들도 무대에 선다. 또한 김창완과 심수봉, 김덕수, 백현진, 김범수, 다이나믹듀오의 라인업은 그동안 쌈사페가 만들어온 자신의 성격이 있기에 위화감 없이 성립한다. 연예인과 뮤지션의 경계가 모호한 한국에서 쌈사페는 그것의 경계점을 명쾌히 집어내는 감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반가운 이름은 유앤미블루다. 지금 솔로 뮤지션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이승열과 영화음악 감독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방준석의 듀오였던 유앤미블루는 그 자체로 한국 대중음악사의 전설이다. 시대를 잘못 만났던 비운의 90년대 밴드, 그러나 그들의 진가를 알아주는 시대가 되면서 절판된 앨범들이 10만원이 넘는 이변을 만들어냈던 그들이 지난여름 제천국제영화제 이후 다시 한 번 뭉치는 것이다.
쌈사페의 트레이드마크로 꼽을 수 있는 프로그램은 일종의 신인 발굴 프로젝트인 ‘숨은 고수’다. 로로스, 할로우잰, 국카스텐 등 매년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오디션을 통과한 숨은 고수들은 아니나 다를까, 곧 인디신의 라이징 스타로 떠오르곤 했다. 올해 쌈사페가 특별한 이유는 이번의 숨은 고수들뿐만 아니라 역대 숨은 고수들이 한 무대에 서기 때문이다. 국내 페스티벌계에서 처음으로 도입되는 회전무대 위에서 펼쳐질 장르와 세대의 합종연횡은 ‘진짜 음악’을 찾는 이들이 10월3일, 서울 올림픽 공원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게 할 것이다.
지난해 가을,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모두 부산으로 내려가 있을 때 음악팬들은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페스티벌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이하 GMF)은 기존의 음악 페스티벌과 확실한 차별점이 있던 페스티벌이었다.
감성음악을 모토로 모던록, 포크, 일렉트로니카 계열의 뮤지션들이 출동해서 여성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던 GMF는 올해 두 번째를 맞아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더욱 훌륭한 음악 축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10월17일부터 19일까지 올림픽공원에서 열리는 올해의 GMF에는 미국 인디록의 대부인 요 라 텡고와 일본 어쿠스틱 기타 듀오 데파페페 같은, 이 페스티벌에 딱 들어맞는 해외 팀들이 있다. 봄여름가을겨울과 토이, 자우림, 델리스파이스가 페스티벌 무대에 선다.
지난해 루시드폴로 GMF에 참여했던 조윤석은 올해 파격적 결정을 내렸다. 그가 루시드폴로 솔로 활동을 하기 전 결성했던 밴드인 ‘미선이’로 무대에 서는 것이다. 이 발표에 음악팬들이 술렁거렸던 건 당연하다. 1998년 음악잡지 에서 독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올해의 음반’에 예상을 뒤엎고 1위를 차지했던 것이 미선이의 데뷔 앨범이었다. 루시드폴 음악의 원류라 할 수 있는 등 주옥같은 명곡들이 가득 들어찬 이 앨범은 펑크와 모던록으로 이분화된 당시 인디 음악계의 도식에서 벗어나 있는, 어떤 내밀한 감성의 극치였다. 그 노래들을 다시 들을 수 있다니,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윤석의 ‘미선이’를 볼 수 있다니올림픽공원의 청명한 야외와 실내, 잔디와 호숫가를 고루 활용하며 ‘록 페스티벌=탈진’이라는 등식을 깨버리는 GMF가 이런 추세로만 가준다면, 우리는 명백히 차별화된 음악 축제를 갖게 될 게 틀림없다. 아니, 사실은 이미 그렇다.
흘린 땀을 금세 식혀주는 바람을 맞으며 방방 뛰는 청춘남녀들이 몰리는 쌈사페도, 땀 흘릴 일 거의 없이 녹차병을 찰랑거리며 산책하듯 공연을 즐길 수 있는 GMF도 여름 페스티벌의 필사적 분위기와는 다른 여유가 함께한다. 그러니 밤이 되면 고개를 들어 하늘도 볼 수 있는 느긋함마저 생길 수밖에.
생애 가장 아름다웠던 달을 기억한다. 2000년 10월 어느 주말 밤,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는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제2회 쌈사페가 절정으로 향하고 있던 시간이었다. 을 끝으로 잠시 공백기를 가졌던 노브레인이 로 컴백한 뒤 연 첫 대형 무대였다. 에 이어 을 연주했을 때 스탠드 맨 뒷줄의 사람들까지 모두 일어섰다. 그리고 함께 ‘오이(oi)!’를 외치며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2000년의 표정엔 90년대의 그것에서 느낄 수 있던 쓸데없는 엄숙주의 따위는 없었다. 다만 이 자리에서 즐기며 하나가 된다는 느낌이 있었을 뿐. 그게 바로 그날 밤의 달에 특별한 아름다움을 부여했다. 음악이 아니었다면, 관객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그날 밤 하늘 같은 건 쳐다볼 일도 없었을 거다. 달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닭살 돋는 생각도 당연히 안 했을 거다. 60년대 이래 음악 공연의 꽃이 된 야외 음악 페스티벌에 처음으로 참가했던 사람이라면 얼추 비슷한 경험을 한 번씩 해봤을 거다.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번 가을에도 그런 달을 만날 수 있으리라.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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