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베이징올림픽 최종예선에서 슬로베니아·캐나다와 멋진 경기 보여준 남자농구
▣ 아테네= 송호진 한겨레 스포츠부 기자dmzsong@hani.co.kr
누군가 “여기서라도 성공시켜보죠”라고 권했다. 김남기 감독이 손가락 다섯 개를 쫙 폈다. 저녁 무렵, 그리스 아테네의 한 식당에 모인 사람들 중 5명이 일어나 순서대로 돌아가며 ‘11초’ 안에 컵에 담긴 음료수를 모두 비웠다. 저 손가락은 뭐고, 11초는 또 뭔가. 남들이 보면 의아해할 법한 이 모습에 김 감독도 “허허” 웃긴 했지만, “이길 수 있는 경기였는데…”라며 아쉬움을 온전히 감추지 못했다.
2점 추격하려 빠른 공격 들어갔지만…[%%IMAGE4%%]
바로 그날 오후, 그러니까 지난 7월16일 아테네에서 열린 2008 베이징올림픽 남자농구 최종예선 한국과 캐나다와의 C조 최종전. 경기 종료까지 11초가 남았다고 알리는 전광판. 77-79, 한국이 2점 뒤져 있었다. 김남기 감독이 손가락 다섯 개를 펴 흔들었다. “얼리 어택.”(빠른 공격) 연습한 ‘패턴’대로 서둘러 움직여 11초 안에 골을 넣자는 선수들과의 교감 신호였다. 주희정(안양 KT&G)이 공을 몰았고, 골 밑에 들어간 대표팀의 유일한 대학생 오세근(중앙대)에게 공을 안겼다. 공이 오세근의 손을 떠났고, 공이 림에서 퉁퉁 튀겼고, 종료 버저가 울렸고, 한국 쪽 점수엔 변화가 없었다. 선수, 감독, 코치가 일제히 심판을 바라봤다. 오세근이 슛할 때 상대가 반칙에 가깝게 몸을 밀쳤는데 왜 휘슬을 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충분히 그렇게도 보였으나, 심판은 “이제 경기가 다 끝났잖소”란 표정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한국은 3쿼터 초반까지 18점을 앞섰다. 거기까지 되돌릴 필요도 없이, 4쿼터 3분12초를 남기고 77-65, 12점 차로 내뺀 상태였다. 한국의 8강이 눈앞에 보였으나, 이후 선수들은 골 밑으로 밀고 들어오는 캐나다의 중앙 공격과 캐나다 공격자 반칙에 관대한 심판 휘슬에 휘말려 한 골도 넣지 못한 채 14점을 내줬다. 12년 만에 노리던 올림픽 출전이 좌절되자, 31살 주장 주희정은 20대 젊은 후배들을 위로하며 코트를 빠져나갔다. 국내 최고센터 김주성(원주 동부)은 “정말 이기고 싶었는데 너무 뼈아프다”고 했다. 김주성이 이렇게 안타까워하는 걸 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농구대표팀이 아테네로 떠나는 날, 그들은 팬들과 여러 언론들의 큰 배웅을 받지 못했다. 6개 대륙 지역예선에서 올림픽 직행 티켓을 따지 못한 12개국이 참가해 3위까지 올림픽 진출권을 주는 이번 대회에서 한국은 2전 전패로 8강도 못 가고 올 것이란 전망 탓이었다. 대표팀이 듣지 않게 하는 걱정이란 게, “스코어가 확 벌어지면서 모든 걸 포기하고 허무하게 무너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그건 “주변의 예상대로라면 우린 그냥 아테네에서 놀다가 지고 와야 하는 것이냐. 한국 농구가 이 정도는 올라왔다는 걸 보여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대표팀의 의지와는 딴판이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 대기와 비행을 합쳐 18시간 넘게 도착한 아테네는 뜨거운 도시였다. 수은주 눈금은 영상 35도쯤은 우습게 여기며 치고 올라갔다. 도심 중앙에 우뚝 솟은 아크로폴리스가 시야에서 완전히 멀어진 곳에 체육관이 있었다. 선수들은 국내에서 큰 기대를 받지 못하고 왔으나, 오히려 현지에선 오스트리아 유학생들이 30여 시간 버스를 타고 응원을 올 만큼 환대를 받았다.
국내 잿빛 전망 머쓱하게 만든 분투
1차전 상대 슬로베니아는 스페인, 그리스 등 유럽 리그에서 뛰는 선수뿐 아니라 미국프로농구(NBA)에서 활약하는 라쇼 네스테로비치(213cm·토론토 랩터스)까지 있는 강호였다. 20~30점 차로 질 게 뻔하다는 경기였는데, 76-88로 패하긴 했으나 한때 5점 차까지 따라붙는 등 상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4쿼터에 들어서며 감독과 선수들이 “한번 승부를 걸자”고까지 했으니, 포기할 것이란 국내 잿빛 전망이 머쓱해지는 순간이었다. 한국 농구를 물렁물렁하게 봤을 캐나다도 막판에 역전승을 거두기는 했으나, 18점 차까지 한국에 뒤졌을 땐 허둥지둥대며 범실을 연발했다.
내심 노렸던 1승을 따내진 못했지만, 김남기 감독은 “지금 이 젊은 선수들을 잘 훈련하면 세계 8강 정도는 갈 수 있겠다는 희망을 발견한 것에 만족한다”고 했다. 김 감독은 스타급 선수들이 부상 등 여러 이유로 대표팀을 고사하자, 의욕이 넘치는 20대 초·중반의 어린 선수 위주로 대표팀을 구성했다. 특히 정영삼(24·인천 전자랜드)은 ‘명품 돌파’라는 수식어답게 과감한 플레이로 자신을 업그레이드했다. 한 농구인은 “가드 양동근이 도하아시아경기대회 대표팀에 다녀온 뒤 성장한 것처럼, 정영삼도 이번에 많은 걸 배웠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전정규(25·대구 오리온스)도 기복 없는 슈터의 자질을 유감없이 보여줘 다음 시즌 활약을 예고했다. 주희정과 김주성은 새삼 한국 농구에 대한 스타 선수의 책임감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준 선수였다. 일부 선수의 경우, 어차피 이번 올림픽 예선에서 가망이 없으니 가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개인적인 사유를 들어 대표팀 차출을 꺼리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2년 연속 프로농구 도움왕을 차지한 주희정은 스스로 대표팀 차출을 원했다. 국제 무대에서 한국 농구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게 선수로서 얼마나 뿌듯한 일이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물론 이번 대회에서 국내 농구의 룰이 국제농구연맹(FIBA) 룰에 맞춰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과제를 남기기도 했다. 국내 농구는 트래블링(공 잡고 3보 이상 걸는 반칙)엔 엄격하지 않고, ‘3초룰’(골대 밑 페인트존에서 3초 이상 머물지 말아야 하는 것)엔 엄격하다. 어기적거리는 스텝을 해도 심판이 ‘트래블링’을 넘어가주지만, 페인트존에서 3초 이상 머물렀다 싶으면 휘슬을 분다. 하지만 FIBA 주관 대회 심판들은 조금만 어기적거려도 ‘트래블링’을 부는 반면, 페인트존에서 3초를 넘었다 싶어도 휘술을 불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이번 대회에서 한국 선수들이 트래블링으로 걸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비교적 관대한대도 3초룰에 걸릴까봐 골 밑에서 버티지 못하고 자꾸 밖으로 나오다 골 밑 공간을 내주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또 김남기 감독은 “탄력과 개인기 위주로 하는 미국 농구보다 내외곽 조직력으로 플레이하는 유럽 농구를 배워야 하는 걸 느꼈다. 대표팀도 유럽 전지훈련 지원을 받고, 지도자들도 그리스 같은 유럽 농구를 둘러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지고 물러나도 얻은 게 많았던 시간
그러나 무엇보다 선수들이 ‘위드아웃 볼 플레이’(Without ball play·공을 갖고 있지 않을 때의 플레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깨닫고 보여줬다는 데 의미가 있다.
김 감독의 얘기다. “농구가 40분 경기입니다. 각 팀 주전 5명씩 총 10명이 뛰죠. 그럼 (산술적으로) 한 명당 4분씩 공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걸 공격과 수비로 나눈다면 실제 공격할 때 자신이 공을 갖고 있는 시간은 2분뿐입니다. 여기에 교체 선수들이 몇 명 더 들어가니 시간은 좀더 줄어들겠지요. 선수들에게 말합니다. 자, 그럼 공을 갖고 있지 않은 38분간 너흰 뭘 할 거냐? 공이 없을 때의 플레이를 생각해야 할 것 아니냐.”
공 잡은 동료가 치고 가도록 공 없는 내가 상대 선수를 막아주는 스크린 플레이, 동료의 공을 받을 수 있도록 공 없는 내가 수비 뒷공간으로 들어가는 움직임, 지친 동료를 위해 한 발 더 뻗어 수비해주는 것. 이번 대회에서 그런 모습을 통해 무기력하게 지는 걸 막아낸 선수들은 동료를 위해, 팀을 위해 묵묵히 뛰는 ‘위드아웃 볼 플레이’란 삶의 가르침까지 가슴에 담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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