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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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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심모녀’, 아줌마 환심 사네

등록 2008-06-20 00:00 수정 2020-05-03 04:25

세 모녀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한결 다양해진 ‘아줌마 영화’ 시장에 또 하나의 상을 더해

▣ 김경욱 기자dash@hani.co.kr

“무식한 여편네야, 그러니까 여기서 과일이나 팔고 있지.”

아파트 부녀회장의 입에서 터져나온 소리다. 아파트 앞에서 과일을 파는 처지에서 하늘처럼 받들어야 할 부녀회장‘님’의 말씀이지만 이 정도면 막가자는 것이다. 남편 없이 홀로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철부지 딸을 돌보면서 억척스럽게 살아온 ‘무식한 여편네’에게 남은 것은 ‘깡’이요, 는 것은 ‘악’뿐이다. 아깝기 그지없지만 무려 8천원이나 하는 수박을 바닥에 던져 박살을 낸 뒤 외친다. “이 여편네가 죽으려고 그냥!!!”

‘이빨을 꼭 앙다물고 눈은 부릅뜬’ 아줌마들

6월12일 개봉한 영화 는 남희(심혜진)가 8천원짜리 수박 깨는 소리로 시작한다. 이 ‘아줌마’의 ‘깡다구 있는’ 모습은 한 주 앞서 개봉한 의 아줌마들과도 비슷하다. 는 보다 더 다양한 아줌마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무리 봐도 ‘걸’은 없지만 엉겁결에 조직된 이 ‘걸스카우트’는 개성과 억척스러움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들이다. 남편과 이혼한 30대 미경(김선아)과 남편과 사별한 뒤 두 아들을 홀로 키우고 있는 40대 봉순(이경실), 노총각 아들과 단둘이 살면서 동네 마트에서 일하는 60대 이만(나문희)이 연령별로 골고루 포진한 아줌마들이다. 이들은 20대 은지(고준희)와 합세해 건장한 사채업자들과의 대결도 마다 않고 곗돈을 들고 튄, 또 다른 아줌마 혜란을 쫓는 추적극을 벌인다.

물론 각자의 상황과 이야기의 뼈대는 다르지만 두 영화에 등장하는 아줌마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남편이나 다른 가족의 도움 없이 홀로 가정을 이끈다. 이 두 영화는 이런 ‘이빨을 꼭 앙다물고 눈은 부릅뜬’ 설정을 아줌마들에게 부여함으로써 이 시대 아줌마들의 전형성을 다시 한 번 다진다. 그렇지만 그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가 남성을 여성으로 바꿨을 때 일어나는 효과를 노린 ‘여성 액션영화’인 반면, 는 여성의 정서를 잘 살린 ‘드라마’로 정면 승부를 건다.

이렇게 ‘아줌마들 영화’가 다양해졌다. 올 1월 개봉한 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스포츠 영화였다. 은 딸의 남자를 사랑하는 어머니의 로맨스를 그렸다. 나이만이 아니라 사랑을 그리는 넉넉함에서도 보다 한발 더 나갔다. 곧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전쟁영화도 한 편 등장한다. 이준익 감독의 는 남편을 찾기 위해 위문공연단이 돼 베트남전 한복판으로 뛰어든 여자의 이야기다. 에서 희생자로 그려진 여성과 분명 다를 것이다. 이는 주말 드라마를 넘어 ‘로맨스’가 주가 되는 미니시리즈로 진입한 아줌마 열풍이나, 뮤지컬 가 인기리에 공연되고 있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를 제작한 이룸영화사의 조윤정 프로듀서는 “문화와 공연 영역에서 30대 여성의 티켓 파워가 커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1990년대 대중문화를 주도했던 세대가 이제는 경제력을 갖춘 성인으로 성장했고, 제작사와 기획사가 30~40대 여성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경쾌하지만 묵직하게, 진지하지만 유쾌하게

는 앞서 나온 주목할 만한 영화들과 함께 ‘아줌마 영화’의 새로운 상을 제시한다. 30~40대 여성들을 정면으로 겨냥한 는 가족에서 출발한다. 가족 안에서 여성은 누군가의 딸이지만 자신이 자식을 낳아 어머니가 되고 세월이 흘러 할머니가 되기도 하는 존재다. 영화는 그 지점을 파고들어 가족에 파묻혀 여성성을 잃어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남희의 곁에는 치매 걸린 어머니인 간난(김수미)과 아나운서를 꿈꾸는 스무 살 딸 나래(이다희)가 있다. 간난은 기억과 정신이 오락가락하지 않고 항상 그때 그 소녀 시절에 머물러 있다. 딸 남희를 ‘올케’라고 부르고, 손녀인 나래에게는 ‘언니, 언니’ 하며 놀아달라고 아이처럼 떼를 쓴다. 대청마루에 누워 손녀인 ‘나래 언니’와 함께 비키니를 입고 일광욕을 즐기는 것은 취미요,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치는 것은 특기다. 오랜 세월 자신과 함께해온 요강을 시의적절하게 활용하면서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달인의 면모를 과시하기도 한다. 아나운서가 되겠다고 1천만원이 든 엄마 통장을 훔쳐 서울로 가출한 나래는 만만치 않은 현실에 부딪혀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만 허영심과 철딱서니 없는 성질만큼은 그대로다. 1천만원을 탕진하고 돌아와서는 “통장에 얼마 없던데”라고 하거나 “장사하고 왔다”는 엄마에게 “뭐? 정사?”라고 되받아치는 ‘왕싸가지’에 ‘노개념’인 인물이다. 이렇듯 영화는 남희의 가족을 비추면서 남희가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이기 전에 간난의 딸이자 나래의 엄마로 아등바등 치열하게 살 수밖에 이유를 간접적으로 설명한다.

는 개성 강한 남희의 가족에 살짝 ‘맛이 간’ 청년 준(이상우)이 얼렁뚱땅 스며들면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들을 서서히 드러낸다. 의 아줌마들이 곗돈을 찾기 위해 진흙탕에 구르고 머리끄덩이를 잡는 사이, 의 집에서는 작은 웃음이 하나둘 피어나는 식이다. 그래서 가 “내 돈 어디 있어, 내 돈”이라고 외치는 아줌마들의 그칠지 모르는 악다구니를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반복해 보여준다면, 는 시골의 풍광을 배경으로 가족의 의미와 행복의 소중함을 잔잔하게 일깨워준다. 순수 청년에게서 시작된 파장은 이들 가족을 거쳐 객석에게까지 전달된다. 여기에 더해 사는 데 바빠 추억은 퇴색하고, 로맨스는 공허해지고, 삶은 팍팍해진 중년 여성의 여성성과 로맨스를 섬세하고 미묘하게 들춰낸다. “이름이 뭐예요?”라고 묻는 준에게 “이름은 무슨, 그냥 여편네지 여편네”라고 쓸쓸히 말하던 남희가 서서히 자신의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이 경쾌하지만 묵직하게, 진지하지만 유쾌하게 그려진다.

이번 작품으로 첫 장편 데뷔를 한 조남호 감독은 동화 속 주인공 같은 준을 통해 간난에게는 이웃집 오빠를 향해 시를 쓰던 순수의 시대를, 남희에게는 잃어버린 자신의 존재를, 나래에게는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한 어머니의 사랑과 가족의 행복을 되돌려준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준에게는 세 모녀를 통해 버려졌던 가족의 따뜻함을 느끼게 해준다. 이처럼 시종일관 감독의 시선은 너그럽다. 그렇지만 지루하지 않다. 끊임없이 폭소를 터지게 하는 상황과 ‘대사발’ 덕분이다. 그리고 그것의 팔할은 공주병 치매 할머니를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소화해낸 김수미에게 빚져 있다. 오매불망 남희만을 바라보고 가슴앓이하는 ‘답답 노총각’ 정씨 역을 정감 있게 표현한 이계인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제목과 포스터, 의심스러운 흑심

그러나 의 관객이 되려면 ‘흑심모녀’라는 ‘흑심’ 가득한 영화의 제목과, 간난이 남희와 나래를 안고 있는 준의 엉덩이를 뒤에서 음흉한 표정으로 만지는 포스터 등이 노리고 있는 ‘얄팍함’을 넘어서는 ‘준엄한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점. 잘 만든 영화에 엉뚱한 홍보로 제 살 깎았다. 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의 공세가 이어지고 있는 여름을 정면으로 뚫고 나가겠다는 거겠지만, OO엄마, 아줌마, 여편네가 아닌 자신의 이름을 찾아가는 한 아줌마의 이야기는 어떤 계절이든 푸근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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