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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벽화에 집시가 춤춘다

등록 2008-03-28 00:00 수정 2020-05-03 04:25

안상복 강릉대 교수 “5~6세기 인도 ‘괴뢰자’의 재주와 하는 일이 장천 1호 벽화 내용과 거의 일치”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플라멩코’ 춤이나 ‘떠돌이’를 흔히 떠올리게 되는 집시의 역사에 대해 우리가 아는 상식은 대개 서양 역사와 연관된다. 원래 인도의 유랑민족이었다가 중·근세 이후 서아시아와 유럽 각지로 뻗어나가 유랑집단을 형성하면서, 특유의 감각적인 춤·음악으로 유럽의 기층문화 형성에 이바지했다는 것 정도다. 최근 정반대 쪽인 동아시아의 중국, 한반도, 일본 등에도 고대부터 집시 계열 유랑자들이 흘러들어와 활발한 기예 활동을 펼쳤다는 주장이 나왔다. 5~6세기 삼국시대에 서역과 중국을 지나온 인도·서역계 유랑집단들이 고구려를 거쳐 백제, 신라, 일본으로 흘러들어 갔으며 이들의 놀이판 흔적이 고구려 벽화에 그려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가문으로 잘 알려진 재인집단 남사당패는 이들 집시의 후손이라는 말일까.

△ 고구려 무덤인 장천 1호분 북쪽 벽에 그려진 . 탈을 쓴 채 큰 나무를 타는 원숭이·칼·방울을 잇따라 던지며 재주를 피우는 사람, 마술사, 춤추는 무희와 거문고 악사 등의 놀이마당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안상복 교수는 이 그림을 서역 집시계 유랑집단의 놀음 장면으로 보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고대 동아시아 연희사를 연구 중인 안상복 강릉대 중문학과 교수는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말한다. 그는 지난 3월21일 열린 한문학 연구자 모임 ‘문헌과 해석’의 정례발표회에서 ‘고구려 벽화로 본 동아시아의 집시-괴뢰자’란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인도와 서역을 거쳐온 ‘괴뢰자’(傀儡子)라는 유랑집단이 동아시아의 집시집단으로 활동했으며, 이들이 조선시대 남사당패에 이르는 유랑예인 집단의 뿌리일 수 있다는 설을 제기했다. 그 유력한 증거로 지목한 것이 중국 만주 지안에 있는 고구려 고분 장천 1호분의 벽화다. 그는 1970년 이 고분을 처음 조사·보고한 중국 지린성 박물관 지안현 문물보관소의 보고서 기록과 도판을 근거로, 그림 상단에 있는 재주 부리는 사람, 원숭이 등의 재주놀음 장면이 바로 괴뢰자로 불렸던 집시 유랑집단의 놀이마당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기록대로 쌍칼 돌리고 인형 기예 벌이고

장천 1호분은 무덤 벽면을 풍속도, 예배도, 사신도 등의 그림으로 빽빽이 채운 것이 특징이다. 재인이 등장하는 문제의 그림은 전실 북쪽 벽에 나타난다. 크게는 아래쪽 수렵도와 윗부분의 재주놀음, 연주 그림(백희기악도)으로 화면이 나뉜다. 윗면의 경우 큰 나무와 가면 쓴 채 나무를 탄 황색 원숭이 두 마리, 원숭이를 부리는 남녀 놀이꾼, 묘 주인과 손님, 시종, 큰 백마, 흰 개, 홀로 춤추는 남자와 거문고 반주를 하는 여인, 마술사, 씨름 장면 등이 보인다. 반면 아래쪽은 윗면과 구분 없이 멧돼지 등의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수렵과 기예 장면이 경계 없이 뒤섞여 있는 이 그림의 주인공이 실제 유랑집단이란 근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 근거는 400~500년 뒤인 11~12세기 일본 헤이안시대에 간행된 당시 풍속 해설서인, 오에 구니하사의 (괴뢰자기)의 기록에 나온다고 안 교수는 설명한다. 여기엔 서역,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온 유랑집단 괴뢰자들의 생활방식과 벌이는 재주 등이 자세히 소개돼 있는데, 재주의 종류와 재인집단이 하는 일 등이 장천 1호 벽화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 문헌에서 괴뢰자는 남자의 경우 말 타고 수렵하는 것이 생업이며, 간간이 쌍칼·구슬을 돌리거나 인형을 춤추게 하는 기예를 번갈아 했다고 나온다. 여자는 생업과 더불어 가무와 매음(성매매)을 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밤에는 신들에게 제사 지내며 노래하고 춤추고 떠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몇몇 예인은 전형적인 서역계 특징 뚜렷

안 교수는 문헌의 거의 모든 내용이 벽화에 묘사된 다양한 재주놀음과 노래·춤, 수렵 장면의 내용과 들어맞는다고 설명했다. 또 사람보다 큰 말이 이례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말장사를 생업으로 하며 말을 희생물로 즐겨바쳤던 집시의 풍속과 통하며, 벽화 전면에 큰 나무를 그린 것은 하늘과 교감하는 성스러운 나무(신목)로, 이땅의 옛 놀이패 집단이 제사를 지내며 숭배했다는 의 기록과도 부합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천 1호분 벽화는 등의 이름이 더욱 합당하다는 것이 발표자의 주장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벽화 속에서 재주를 넘는 예인들 몇몇은 코 크고 얼굴이 큰 전형적인 서역계의 특징을 뚜렷하게 지닌다는 점이다. 따라서 일본 문헌에 기록된 괴뢰자는 고구려에서 활동하다 건너간 집시계 유랑집단들의 후예일 공산이 크다는 얘기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집단은 일반적으로 인도 북부에서 빠져나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집시집단의 한 지류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게 발표자의 견해다. 같은 계보로 중국 역사서 에 고구려의 ‘굴뢰자’(꼭두각시극의 원류)가 당나라에 다시 전래됐다는 기록 등을 보더라도, 고구려는 당시 서역에서 온, 재주 부리는 집시집단의 거점 구실을 했으리라고 안 교수는 추정하고 있다.

안 교수의 연구는 그동안 서양과 중동으로 옮겨간 통로만 연구해왔던 집시 이동의 역사에서 반대편인 동쪽의 경로를 추적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는 “집시의 동쪽 이동 경로는 현재 거의 연구가 되지 않은 분야지만, 나는 상당수가 한반도에 들어와 정착한 것으로 본다”며 “그 유력한 증거가 바로 장천 1호분이며, 곽독희의 분포 현황도 그런 집단의 이동 경로를 뒷받침하는 유력한 방증 자료”라고 말했다.

안 교수는 에 신라의 원효가 7세기 조롱박 인형으로 만들어 인생무상의 불교적 진리를 설파하고 포교용으로 썼다는 가무극 를 분석한 결과, 그것이 꼭두각시 인형극의 원형일 것이라는 견해도 발표했다. 그는 “가 꼭두각시 놀음의 원류로, 중국에서 건너온 곽독희의 일종으로 해석된다”면서 이 가무극이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유랑집단 괴뢰자의 맥을 이으면서 조선시대 꼭두각시 놀음으로 전승된다는 논지를 펼쳤다.

“는 ‘곽독희’의 일종”

현재 한·중·일 학계에서는 꼭두각시를 비롯한 동아시아 주요 광대극과 재인집단의 기원을 둘러싸고 여러 가설들이 제시돼 있다. 괴뢰, 광대, 곽독, 꼭두 등 놀이 이름의 어원을 살펴볼 때 서역·인도 계통이라는 견해가 상당수이며, 지역 독자 발생설, 심지어 중동의 시리아 기원설까지도 나온다. 하지만 아직 고고학적 조사나 유적 확인 등을 통한 구체적 이동 경로나 물증은 거의 제시된 바 없다. 안 교수는 “기존 학계의 추정에 비해, 이번 논고는 고대 기예집단의 계통과 유입에 대한 구체적 물증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것”이라고 말했다. 안 교수는 논고의 문헌 사례들을 보완한 뒤 학술지에도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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