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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금에 피우진이 겹치다

등록 2008-03-07 00:00 수정 2020-05-03 04:25

강인한 형사에게 요구되는 여성성의 그림자, 문화방송

▣ 이김나연 언니네트워크 @asia팀

등 역사적 인물의 재조명이라는 이름 아래 온통 남성 일색이던 텔레비전 드라마 제목에 오랜만에 여성이 등장했다. 이름하여 ! 그는 가죽 점퍼와 가죽 바지, 그리고 총 한 자루를 들고는 강력계 형사라는 신분으로 호기롭게 나타났다. ‘엄마’도 ‘마님’도, ‘그 여자’도 아닌, 박정금(배종옥)이라는 자신의 이름 세 글자를 들고서 말이다.

주먹의 상처를 치료해주는 남성들

문화방송에서 방영되는 주말 드라마 에는 제목 그대로 박정금이 등장한다. 그에겐, 박정금 여사(드라마의 등장인물 사공유라가 부르는), 정금아(박용준이 부르는), 박 형사(강력계 팀장이 부르는) 등의 수식어보다 박정금, 그 이름 자체로 불리는 것이 더 어울린다. 여사라 불리기엔 나이가 ‘젊고’, ‘험한’ 일을 하고 있으며, ‘정금아’라고 불리기엔 여성 개인으로 친밀한 관계 형성이 버거워 보이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애 딸린 이혼녀라는 배경이 그를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강력계 박 형사라 불리기엔, 법보다 앞선 그의 ‘인간적인 정의로움’이 부각된다. 그러나 반면, 이름 세 글자로 호명되는 그이기에 새로운 기대감이 생긴다. 불과 몇 년 전, 기존 여성성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 김삼순은 제발, 부디 자신의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부르짖지 않았던가.

“아마 나중에 저 남자 둘 다 좋아하게 될 것 같아.” 설 연휴를 맞아 오랜만에 집에 내려간 내게, 엄마는 전주에 새롭게 시작한 주말 드라마라며 그동안의 줄거리를 읊어주시더니만 엄마 나름의 예상 결말을 덧붙이셨다. 박정금을 중심으로 삼각관계가 펼쳐질 것이라는 엄마의 예상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아니, ‘천하일색 박정금’인데 그를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 설정이 되어야 할 테니 말이다. 문제는 그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즉 관계 형성에서 박정금의 모습이 온존히 드러나고 발현되는가일 것이다. 그는 기대만큼, 씩씩하고 당당하며 자신을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지워진 삶의 무게가 때론 버겁게 느껴지지만 말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유리 장식장을 주먹으로 내리쳐 생긴 주먹의 상처를 닦으라고 한경수(김민종)가 손수건을 건넨 순간, 한경수에게 박정금은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고 있는 사공유라(한고은)의 ‘이복언니’가 아니라 자신과 닮은 상처를 지닌 그래서 보듬어주고 싶은 여성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범인 검거를 하다 칼에 찔린 박정금의 어깨 상처를 박용준(손창민)이 보고 치료를 해주는 순간, 박정금은 아파트 분양 사기로 인한 이상한 동거를 하고 있는 옆방 아줌마가 아니라 ‘2층집 공주님’으로 회귀한다.

박정금의 몸에 난 상처는, 곧 그가 간직하고 있는 내면의 아픔의 외형화이자 ‘여성적’ 몸적 이미지의 표현이다. 가정부와 재가한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당한 돈 한푼 없는 내쫓김, 남편의 바람과 이혼, 그리고 잃어버린 큰아들. 그가 간직한 아픔의 상처가 그의 몸에 난 상처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남성으로 하여금 보호해주고 싶은 여성으로 상정된다.

후배 형사를 툭툭 치고, 검도를 하면서 울분을 풀고, 범인 검거를 위해 내달리고 발차기를 하는 박정금의 몸의 이미지는 분명 ‘여성적’ 몸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몸에 상처가 난 순간, 다치기 쉽고, 훼손될 수 있는 부드럽고 약한 여성의 몸적 이미지가 강조된다. 병원 갈 시간이 없어서 혹은 울분을 삼키느라, 자신의 몸에 난 상처 치유에 대한 관리와 통제에 대한 계획과 실천은 그의 몫이 아닌 것이다. 박정금의 몸의 재생이 한경수 변호사나 박용준의 몫으로 넘어간 순간, 한경수는 박정금에게 “우리 그냥 이렇게 상처를 보듬어주면서 살면 안 될까요?”라고 고백하고, 박용준은 동네 아파트 주민들이 자신과 박정금을 부부라고 오해하는 것에 대해 굳이 정정하지 않으려 한다.

양가슴 절제한 피 중령을 막아선 것

자신의 몸의 훼손을 재생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결정을 내린 현실의 피우진 중령은 예상치도 못한 결과를 맞이했다. 유방암 치료를 위해 혹이 있는 왼쪽 가슴 절제술을 하면서, 평소 군 생활을 하면서 불편하게 느껴졌던 가슴을 양쪽 다 절제했다. 유방암 치료는 물론, 군대체력평가를 넉넉히 통과할 만큼 건강도 체력도 회복했지만, 정작 그는 “신체 일부가 없다”는 이유로 강제 퇴역 처분을 받았다.

군인사법 시행규칙상 장애등급 2급에 해당한다는 군의 사유는 문맥상으로는 정당해 보이지만, 이를 피우진 중령에게 적용할 수 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육군 헬기 조종사라는 직무를 수행하는 데 아무런 ‘장애’ 요인이 없는, 그에게 누가, 그리고 왜 장애라고 호명하는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성의 몸에 대한 훼손은, 여성의 행위성에 대한 반동적 서사이자 주체적 여성상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다. ‘남성성’이 강조되고 남성적 질서가 강조되는 군대라는 사회 속에서, 여성의 몸에 대한 주체적 결정과 행위에 대한 경계는 아닐까?

사실 나는 “좀더 여성스럽게” 혹은 “여성스럽지 못하게”라는 말에 너무나 익숙하다. 단지 여성, 남성이라는 성별적 모습을 강조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웃는 것, 걷는 것, 앉는 것 등 너무나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에서조차도 말이다. 남성, 여성의 성별 질서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처럼 보이는 스포츠 행위에서도 ‘여성스럽게’ 해야 함이 학습된다. 여성에게 요구되는 몸짓, 자세, 동작, 외모 관리 등은 ‘여성적’ 몸을 생산하고, 여성의 몸은 기존의 질서, 가부장적 질서를 습득하고, 훈육하는 실천의 장인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여성의 몸이 가부장적 질서의 훈육의 장이자 여성의 주체성을 생산하는 장이라면, 박정금이 보여주는 몸적 이미지는 다른 주체 형성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경계에 서서 새로운 캐릭터로 나가길

박정금은 어쩌면 지금 경계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를 둘러싸는 주변 상황은 기존의 ‘여성성’에 대한 도전을 가능케 하지만, 동시에 ‘여성성’을 드러낼 것을 요구받고 있다. 그의 몸은, 아니 박정금은 이 둘 사이를 넘나들며 ‘여성성’의 경합을 벌이는 것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경합을 벌이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다른 모습을 보이고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가는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때론 혼재되어, 때론 복작거리며 말이다.

박정금은 분명, 자신의 목소리를 갖고 있으며 이를 드러낼 줄 아는 여성이다. 이제 그가, 주체적인 모습만큼이나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기대해본다. 그는 ‘천하일색 박정금’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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