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6일 평양, 이틀 뒤 서울에서 릴레이 연주하는 로린 마젤과 뉴욕필하모닉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올해로 탄생 100돌째인 제왕적 지휘자 카라얀(1908~89)은 생전에 ‘클래식 외교관’으로도 굵직한 발자취를 남겼다. 미-소 냉전이 한창이던 1969년 5월 그는 세상이 깜짝 놀랄 문화외교 이벤트를 감행한다. ‘전용 악기’였던 베를린필하모닉 악단을 이끌고 느닷없이 소련으로 연주여행을 떠난 것이다. 카라얀의 제안을 소련 쪽이 뜻밖에도 허락해 성사된 이 공연은 지금도 놀라운 반향을 일으킨 세기의 명연주로 회자된다.
북 문화성 초청·미 국무부 도움에 성사
당시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베를린필 연주는 입석표 수백 장을 찍을 정도로 인산인해였다. 카라얀과 악단은 베토벤의 과 바흐의 , 스탈린 헌정곡인 쇼스타코비치의 을 일사불란한 합주력과 열정으로 연주했다. 모처럼 만나는 서구 악단의 명연에 청중은 미친 듯 열광했다. 젊은 관객들은 문을 부수고 화장실을 통해 들어올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으로 알려진 소련의 작곡 거장 쇼스타코비치(1906~75)는 자신의 교향곡을 투철한 감성으로 지휘한 연주에 감명받고는, 연주 뒤 직접 카라얀을 찾아가 치하의 말을 건넸다. 당시 청중으로 공연을 보았던 명지휘자 마리스 얀손스도 공연 뒤 카라얀한테 개인 지도를 자청했다. 카라얀 평전을 쓴 리처드 오스본은 책에서 “이때가 카라얀으로서는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런 한 순간이었을 것”이라고 적었다. 소련 당국이 베를린필을 ‘서독교향악단’이라고 프로그램 안내장에 표기하는 등 신경전이 있었지만, 카라얀의 소련 연주는 70년대 동·서구권 거장들의 공연 교류를 활성화하는 물꼬가 되었다.
이처럼 섬세한 감성과 박애심에 호소하는 고전음악은 종종 외교 수단으로 애용된다. 힘의 논리가 판치는 국제 무대에서 부드러운 선율로 적대국 사이의 마음을 풀고 접근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에 맞서 싸운 레닌그라드 시민들의 항쟁을 기려 지은 쇼스타코비치의 도 음악 외교의 유명한 사례다. 미국에서 거장 토스카니니가 서방국 최초로 초연한 이래 종전 때까지 연합국 진영의 결속을 다지는 동맹가처럼 서구에서 숱하게 연주되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미국 보스턴 심포니의 소련 연주나, 1973년 필라델피아 교향악단의 중국 연주도 회자된다. 1989년 독일 베를린 장벽 해체 당시 거장 번스타인이 연합악단과 베를린에서 펼친 베토벤의 연주는 잊지 못할 명장면으로 기억된다.
이제 클래식 외교의 또 다른 전범이 21세기 한반도에서 펼쳐질 참이다. 미국 뉴욕필하모닉이 지휘자 로린 마젤과 함께 2월26일 북한의 평양 동평양극장에서 공연한 뒤 28일 서울에서 릴레이 연주를 한다. 지난해 북한 문화성의 초청과 미 국무부 쪽의 도움으로 성사된 이 공연은 북-미 적대관계를 푸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와 윌리엄 페리 전 미국 국방장관 등이 참관하며, 피아노에 조예가 깊다는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의 참석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성조기여 영원하라’ ‘신세계에서’ 연주
뉴욕필의 음악 외교는 전통이 깊다. 1959년 거장 번스타인의 지휘로 소련 연주를 펼친 데 이어 숱한 적대국 공연을 성사시켰다. 지휘자 마젤도 1970년대 러시아에서 공연한 경험이 있다. 외교적 의미 탓인지, 평양의 연주곡들은 미국 냄새가 짙다. 미국 국가 ‘성조기여 영원하라’가 북한 국가에 이어 한국전쟁 뒤 처음 연주된다. 드보르자크의 는 미 대륙의 근대 에너지와 흑인 영가의 선율이 반영된 박력 넘치는 걸작. 로 유명한 미 작곡가 거슈윈의 또한 파리에서 뜨내기 미국 여행자가 느끼는 설렘과 향수를 옮긴 재즈풍 교향시다. 둘 다 뉴욕필 초연이다. 바그너 악극 은 성격은 다르지만, 흥분이 마구 고조되는 금관악의 울림 가득한 축전음악으로 공연의 의미에 맞춤하다. 2월28일 오후 1시30분 열리는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공연(1577-5266)은 베토벤 특집이다. (협연 손열음) 등을 연주한다. 평양 연주는 26일 오후 5시부터 문화방송 등을 통해 국내와 유럽, 미국 등지로 생중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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