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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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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사랑 긴 뒤끝 부추기는 미디어

등록 2008-01-25 00:00 수정 2020-05-03 04:25

이별을 빨리감기하는 와 옛 연인 향해 되감기하는

▣ 이명석 대중문화평론가

요즘 애들은 연애도 쉽게 하니, 헤어지는 것도 칼같이 깔끔하겠지. 느슨한 어른들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유치원생들도 짝짓기가 생활일 정도로 연애 경력의 스타트가 빨라졌다. ‘남친’과 ‘여친’이라는 호칭도 연인이나 애인에 비해 가벼운 느낌을 준다. 그만큼 감정도 쉽게 식고, 홧김에 헤어지는 경우도 허다해 보인다. 그러나 Mnet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뒤끝은 이나 의 30, 40대들에 못지않은 것 같다.

남친에게 “언제 딱지 뗐냐”며 공격

최근 방영을 시작한 는 매우 익숙한 무대를 펼쳐 보인다. 의 ‘자유선언―주먹이 운다’나 일본 프로그램인 의 ‘마이크 배틀’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링과 글러브는 없지만 무대 좌우로 이미 헤어진, 혹은 거의 헤어질 단계의 연인이 올라와 맞상대가 된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토로하면서 서서히 공격 수위를 높여가더니 인신공격까지 서슴지 않는다. 뒤에 앉은 연예인 패널과 방청객으로부터 응원을 받기도 하고, 가끔 화풀이 찬스를 사용해 야구방망이나 자동차 백미러를 부러뜨린다. 한쪽이 수세에 몰려 말을 잇지 못하면, 반대쪽이 승자가 되어 현금뭉치의 ‘돈방석’을 얻는다.

무대 자체는 뻔해 보이지만, 연애라는 게 어쨌든 인생사 최고의 긴장을 만들어주는 이벤트인지라 각각의 싸움에서 제법 쫄깃쫄깃한 디테일을 맛보게 된다. 선팅 잘돼 있는 자동차를 골목길로 끌고 들어가며 스킨십을 기대하는 남자친구와 ‘무드가 있어야지’라는 여자친구의 대결은 고전적이다. 여자친구의 겨드랑이 땀 사진을 포토숍으로 노랗게 처리해 인터넷에 올려 암내녀의 오명을 사게 한다든지 하는 모습은 요즘 세대 속에서도 유머 감각의 차이가 적지 않은 문제를 만들어낸다는 걸 깨닫게 한다. 이런 신선함은 처음 몇 번에 그칠 수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제법 상큼한 리얼리티로 귀를 쫑긋 세우게 한다. 서로 투닥거리는 연애란 게 당사자는 죽을 둥 살 둥 하지만, 옆에서 보는 사람은 영화 류의 스크루볼 코미디를 보는 듯한 재미를 느끼게 하니까.

아슬아슬함은 여기에서 한 차원 더 나아간 치부 들추기와 막가파식의 인신공격에서 나온다. 서로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는 곧 사라지고 만다. 여자친구가 바텐더로 일하는 곳에서 ‘10만원 줄게 2차 가자’라는 남자의 유혹을 받은 사실을 마구 떠벌리고, 남자친구가 처음 딱지 뗀 일에 대해 캐물어 궁지에 몰아넣는다. 사귀는 동안 상대방의 가장 예민한 부분까지 보아온 연인들로서는 터뜨릴 만한 핵폭탄이 한둘이 아니다.

방송사가 ‘엑스’ 스토킹 대행해줘

가 기왕 찢어질 것 확실히 결정짓자는 빨리감기의 버튼이라면, 는 헤어졌지만 잊지 못한 연인을 찾아가는 되감기다. 쌍방 합의하에 밝은 조명 아래 올라온 파이터들과 달리, 옛 연인의 현재를 탐문해달라는 의뢰를 받은 카메라는 흥신소 직원처럼 어두운 추적의 길을 간다. 의뢰인이 기억하고 있는 옛 여자친구의 빌라 이름 하나만으로 추적을 시도한다든지, 택시비도 못 챙긴 채 뒤를 따라가다 낭패를 겪게 되는 제작진의 노력은 가상하다. 그러나 화면에 드러나는 장면들은 방송사가 노골적으로 스토킹을 대행해주고 있는 게 아닌가 여겨질 정도다. 의뢰인이 전해준 정보에 따라 무턱대고 집이나 직장을 찾아가고, 이런저런 거짓말로 카메라를 숨기고 들어가 촬영을 한다. 최소한의 모자이크 처리 같은 건 있지만, 사실상 주변 정황을 통해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이 만천하에 공개된다.

옛 연인을 찾아보려는 ‘의도’ 자체야 마음을 움직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때 내가 병이 있는 걸 밝힐 수 없어서, 어린 나이에 욱하고 화를 내는 바람에, 순간의 실수로 바람을 피우는 바람에…. 누군들 지나간 연애를 돌이켜보며 후회의 한숨을 쉬고, 과연 나 없이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옛 연인의 미니홈피나 블로그를 들락거리고, 그 사람이 속해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게시글을 훔쳐 읽고, 그가 일하는 직장 앞에서 어슬렁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방송사의 과감한 행동력을 빌리면서 그 호기심은 상식 수준을 넘어선다.

우리는 와 비슷한 연출법의 화면을 너무나 다른 상황에서 자주 보고 있다. 그 대부분이 사기나 가정폭력 등 범죄와 관련된 내용이고, 피의자를 몰래 수사하고 그 증거를 남기기 위해 카메라를 활용한다. 그런데 연애를 하다가 헤어졌다는 이유로 범죄자처럼 자신의 사생활을 염탐당하고, 그 내용을 온 국민에게 드러내 보여야 하나? 밤늦게 혼자 으슥한 오피스텔에 들어간다든지 모텔 주변으로 접근한다든지 하는 ‘어떤 뉘앙스’는 해명되지만, 자신에 대한 그런 접근 자체가 모두 용납 가능한 걸까?

20대 초반에 연애한 남자 400명, 한꺼번엔 최다 13명을 자랑하는 여인이 첫사랑을 찾는다. 연애는 빨라지고, 빈도는 높아지고, 방법은 다채로워졌다. 휴대전화와 미니홈피, 온갖 첨단 장비들은 사랑의 방법을 더욱 화려하게 만들지만, 그 수많은 순간들을 증거로 남기는 도구이기도 하다. 만나는 순간마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해킹하기 위해 애쓰지만, 헤어진 다음에는 서로의 뒤를 캐고 까밝히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사랑은 짧고 뒤끝은 길고 미디어는 부추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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