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삼일로창고극장에서 배우 이정훈이 70분간 펼치는 1인극 </font>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막다른 밀폐 공간에서 상상력을 짜본 적이 있는가. 담벼락으로 정면이 가로막힌 수평짜리 소극장 무대 앞. 배우의 눈에 극락과 지옥이 오간다. 안식처 같다가도, 끝 간 데 모르는 막장의 갱도처럼 변하는 곳. 거기서 있는 힘 다해 몸짓과 발성을 짜낸다. 대중가수처럼 노래를 부르며, 말없이 손과 몸을 꼼지락거려 유리벽에 갇힌 죄수의 존재를 발라낸다. 그래야 배우는 살 수 있다. ‘열정과 고통이 뒤섞여 흘러가는 70분’이라고 관객 누구는 평했다.
<font color="#216B9C">△ 여러 몸짓과 표정으로 모노드라마 를 열연 중인 배우 이정훈씨. 대선배 격인 국민배우 추송웅이 천 회 넘게 모노드라마를 공연했다는 ‘전설’을 떠올리면서 그는 말했다. “모노드라마는 죽음의 레이스 같은 거예요. ‘왜 이걸 하는 거지?’하면서 계속 하게되는, 거참 희한한 작업입니다.”(사진/삼일로창고극장 제공)</font>
맑은 밤하늘에 냉기가 빗줄기처럼 몰아치던 1월2일 밤 8시부터 9시20분 사이. 서울 명동성당 뒤쪽 삼일로 큰길 옆 언덕배기의 삼일로창고극장 안에서 배우 이정훈(36)씨는 홀로 1인극(모노드라마) 를 이어나갔다. 70여 분간 미친 듯이, 체념한 듯이 ‘아킨따라’란 동화 속 여행자가 되어 쉴 새 없이 떠들고 움직였다. 동료인 비아비올라의 왕과 함께 동화 속 같은 상상 세상을 떠돌면서 인간 내면의 진실, 소통의 진실을 찾아나섰던 여행의 현장들을 직접 연기하고, 제3의 화자가 되어 들려주고 연출까지 한다.
무대 먼지에서도 대선배 추송웅 느껴
그는 “공간이 주는 부담이 원체 컸다”고 했다. 1975년 창립 이래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민간 소극장의 공간에는 과거 무대의 열정 어린 기운들이 넘쳐났다. 30년 전 카프카 원작을 각색한 이란 원숭이 배우 1인극이 100석을 조금 넘었던 이 극장에서 시작됐다. 8년여간 15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한국 연극의 신화. 그 주인공인 추송웅은 22년 전 홀연히 세상을 떠나버렸지만, 그의 원기가 곳곳의 벽과 바닥, 희미한 불빛 아래 너울거리는 먼지 티끌들 속에 서려 있었다고 이씨는 말한다. 지난해 12월23일부터 시작된 공연 중 여러 차례 무대 공간을 흘러가는 먼지 조각들이 “이봐, 난 추송웅이야”라고 외치는 듯한 환청을 들었다고 한다. 대선배 추송웅은 그에게 높은 벽이자, 존경하는 신화다. “한 인물의 캐릭터로 완전히 변신하기 위한 한 배우의 숭고한 정신”이라고 고인에게 헌사를 바친 이씨는 공연 기간 내내 옛 선배 만나듯 풀썩거리는 먼지들을 들이마셨노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극중에서는 “인생길 왜 가는지 난 알 수 없어”라고 외치는 광인처럼 변신했다. 닷새 동안 나그네가 왕이 되는 나라에서 놀았던 기쁨을 소곤거리며 전쟁터에서 춤추며 싸움을 멈추게 하는 묘미를 전파하면서 그는 무대를 뛰어다녔다.
2002년 초연한 창작극인 는 이정훈씨의 분신과도 같다. 인도에서 수학했던 극작가 황국자씨가 이씨를 위해 지었다는 는 인간의 자유 본성과 평화 본성을 좇아가는 의식의 흐름을 담아낸 초현실적인 극시라고 할 수 있다. 툭하면 동화적 비약과 시공간을 가르는 초월적 장면들이 대사 속에서 난무한다. 공기처럼 세상을 떠도는 주인공 아킨따라는 인생의 진리를 찾아 절규하기도 하고, 사람을 사귀는 마음이 동하면 기뻐 데데거리면서 논다. 의자와 바위 덩어리, 나무만으로 구성된 좁은 무대를 뛰어다니고 구른다. 미세한 먼지처럼 그 또한 공간을 부유하면서 관객에게 독백을 한다. 두 불사조의 사랑 이야기, 파란 나비 내려앉은 바다 마을과 신선의 땅, 춤추는 전쟁터, 가장 위험한 일이 남을 웃기는 일인 나라, 비단강이 흐르는 신비한 얼음호수 나라 등이 이야기 속에 등장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그는 의자 위에서 조명을 받으며 독백한 뒤 불춤을 추다가 어둠 속으로 폭 꺼져버린다.
80석 공연장에 매회 관객 10~20명
“주인공 아킨따라는 힌두말로 ‘진실을 찾아 떠나는 아이’라고 합니다. 무언가를 아낀다는 우리말로도 의미심장합니다. 아이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보라는 뜻이지요. 이 작품에서도 나그네가 닷새 동안만 왕이 되는 나라가 나오고, 말도 안 되는 춤으로 전쟁을 막는 장면이 나옵니다. 줄거리나 구성은 좀 산만하지만, 순수한 마음의 소통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전하려는 겁니다.”
현실은 따라주지 않았다. 12월23일부터 1월6일까지 보름 가까이 공연된 는 흥행에 참패했다. 연말 ‘이삭줍기’식으로 관객을 쓸어모으는 대학로 연극동네와 달리, 80석 규모의 공연장을 관객은 메워주지 않았다. 매회 10~20명 정도의 관객만 들어왔다. 제작비 회수는 초장부터 포기했다. 동시대 한국 연극이 놓치는 많은 부분들을 손수 갈무리했다는 자부심이 마음을 달래준다. 말없이 몸짓으로 하는 마임극은 공연예술의 기초인 까닭이다. 이번 공연은 추송웅이 공연했던 국내 전위극의 명가 삼일로극장에서 10여 년 만에 선보이는 모노드라마였다. 마임 배우 경력 10년을 넘긴 그에게 정통 소극장 무대는 지금의 역량을 가늠하는 진단 기회이기도 했다. 그래서 쓰린 만큼 배우 자신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많았다고 그는 자평했다.
“인간, 관계, 소통이란 화두가 중요하지요. 그것만 있으면 어떻게 표현하든 상관없어요. 뮤지컬적 요소인 노래와 안무도 들어갑니다. 몸짓은 생각을, 상상력을 요구합니다. 요즘 관객이 그리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요, 저는 제 취향대로 갑니다. 따라오고 즐기는 분들이 있으니 힘이 됩니다. 취향 따라 마시는 커피와 비슷한 거죠.”
그의 평가가 이어진다. “2002년 초연된 이래 많이 고치고 다듬었지만 기본적으로 극작이 시의 얼개여서 그런지, 여전히 산만하고 붕 뜨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요. 안정감 있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제약되는 부분들이 꽤 많죠.”
1인 다역에 혼자 연습하는 외로움
그가 말하는 제약이란 연기·연출을 함께 맡다 보니 세세한 부분을 놓친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혼자 연습해야 하는 외로움”과도 통하는 제약이다. 이씨는 대구에서 그렇게 10여 년 정도 활동하며 잔뼈가 굵은 터라 마임과 연극, 연출 등 1인 다역에 능숙하다. 1인극 와 연극 로 이름을 알렸고 한국마임제, 춘천국제마임페스티벌 등에서 계속 창작 작품을 내는 마임 배우로도 활동 중이다. 연기와 연출 등 연극과 인연 맺은 모든 것에 욕심이 많은 이 청년은 “거인국으로 유명한 조너선 스위프트의 소설 를 모노드라마로 각색하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극중 아킨따라처럼 떠도는 것을 좋아합니다. 순수한 마음의 또 다른 아낀따라를 만나고 싶은데 어디서 나타나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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