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간 태백에 살며 작업해 온 화가 황재형의 개인전 ‘쥘 흙과 뉠 땅’
▣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칼바람에 눈발이 소용돌이를 지으며 산골 길 위로 날린다. 탄광에서 스러져간 광부들의 귀곡성이 사무치게 메아리진다는 강원도 태백의 겨울 한철이 화폭에 들어 있다. 귀신의 혓바닥처럼, 차가운 불길처럼 굽이치는 눈발 너머 어딘가에 탄광촌이 있을 것이다.
나이프로 쓱싹여 만든 광산의 질감
옛 탄광촌인 태백에서 20여 년을 살며 일한 화가 황재형(55)씨가 2004년 그린 유화 는 사무치는 삶터의 현실과 몽환적인 자연이 기묘하게 만난다. 스산한 냉기가 감도는 유화 그림을 그는 나이프와 붓으로 그렸다. 그림 위에 색 덩어리를 발라주는 나이프는 그에겐 가장 중요한 연장이다. 유화물감의 색 덩어리는 물론이고, 갖가지 흙을 물감이나 점착제에 개어 만든 덩어리들을 나이프에 실어 쓱싹거리며 화폭 이곳저곳에 덧칠한다. 붓은 거칠게 사물과 자연의 형상, 색을 입힌 나이프 선의 뒷마무리 구실만 한다. “붓으로만 그리면 말쑥하게 윤곽을 정리하고 메시지 전달도 쉽겠지만, 거칠고 생생한 태백 동네와 사람들의 기운을 살리려면 나이프 작업만 한 것이 없다”고 그는 말한다. 덕분에 태백의 광산에서 보낸 20여 년의 시간은 놀라울 만큼 생생한 질감의 공간적 풍경으로 나타났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16년 만에 차린 개인전 ‘쥘 흙과 뉠 땅’(1월6일까지, 02-720-1020)은 광산촌 태백과 그 부근의 산악, 자연, 사람들과 집들을 그린 작품 60여 점을 내놓았다. 음울하고 묵직한 색조에 80년대 탄광촌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가볍고 장식적인 요즘 미술 취향과는 전혀 다르지만, 뜻밖에도 관객과 평단, 언론의 평가는 찬사 일색이다. 참여미술 작품은 미술시장에서 흥행하지 못한다는 통설을 깨고 출품한 대부분의 작품들이 팔렸고,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2007년 거의 유일하게 성과를 거둔 전시란 평가가 나왔다. 천편일률적인 극사실주의 그림이나 대중문화 아이콘을 얼치기로 베껴 그리는 유사 팝아트 그림들이 난무하는 요즘 미술판에 그의 그림은 차별적 지위를 획득했다. 삶터와 자연의 기본 묘사에 충실하면서 대상의 단면들을 다기한 색감과 질감 효과로 포착하는 분석적 리얼리즘의 본령을 보여줄 뿐 아니라 옛 삶터에 대한 향수도 자아낸다.
1층과 2층의 거대 전시장을 가득 메운 그의 탄광촌 풍경과 같은 산 그림들은 일천한 우리 현장미술의 도저한 성취로 기록될 만하다. 광산촌 사람들의 표정이나 자태, 산자락을 묘사한 세부를 들여다보면 집요하고 다기한 붓질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열차를 기다리는 광부 가족이나 월급을 받으러 가는 광부네 가족의 뒷모습, 그리고 어머니의 자궁 같은 태백 부근 산골의 모습 속에는 천변만화하는 색감과 질감의 다기한 변화가 숨어 있다. 석회 섞인 흙, 진흙, 모래 등(이를 그는 ‘쥘 흙’이라 한다)을 여러 매체와 혼합해가며 된장 같은 질감을 빚어내고, 사람의 뒷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무려 20여 가지 색상들을 조합해 나이프로 형상을 떠내기도 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음울한 색조의 마을과 길, 광부 가족 그림들이 되레 편안한 안정감을 주는 것은 이런 붓질이 20년 넘은 탄광촌의 현장 체험을 녹여낸 산물이기 때문이다.
참여미술의 길따라 가족들과 태백으로
그는 82년 중앙대 선배인 농민화가 이종상씨 등과 함께 현장미술을 표방한 작가동인 ‘임술년’ 그룹을 결성해 당시 참여미술 진영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그 임술년 정신에 따라 태백으로 식솔들을 챙겨 이사했다. 한동안 광부로 일하면서 내면의 고투를 치러낸 뒤 자기 감성에 따라 꾸준히 태백 풍경을 그려왔다. 90년대 이후 참여미술이 쇠락하면서 일부 작가들이 ‘업자’라는 비난을 후배들에게 들으면서까지 미술계 이권에 연연할 때도 그는 항심을 지켰다. 현지 아이들과 어른들, 그리고 나라 안의 교사들을 상대로 하는 미술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묵묵히 작업만 해왔다. 현장의 자유로운 공기를 가장 사랑하는 이 다혈질 작가는 작위적인 것을 싫어한다. 지난 7월 참여미술인 모임인 민족미술인협회 동료들과 모처럼 만나 내금강을 다녀왔을 때도 산행의 주목적이던 사생과 8·15 기념 행사의 그림 출품은 거절했다. ‘북한의 통제를 받으면서 시선조차 자유롭게 돌려보지 못한 그림을 출품하는 것은 의미가 없지 않느냐’면서 황씨는 덧붙였다. “아직도 ‘쥘 흙’은 많은데 ‘뉠 땅’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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