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개의 에피소드로 행복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전파하는 영화
▣ 남다은 영화평론가
시사회가 시작되기 전, 무대 인사에 나선 배우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당부했다. “따뜻한 영화입니다. 촬영하는 동안 행복했습니다. 여러분도 영화를 보는 동안 행복하시길.” 나는 영화를 보면서 뭔가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는 기대가 번번이 좌절되는 불행에 가까운 심정을 맛보았지만, 이 어찌되었건 끊임없이 행복을 읊조리는 영화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우리는 사랑해’ ‘사랑만으로도 따뜻해’ ‘그래서 행복해’로 이어지는 도식을 무려 일곱 명의 인물들을 통해 반복하는 영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게 한다. 도대체 무엇을 사랑하는데? 뭐가 따뜻한데? 무엇이 행복인데? 물론 영화는 이렇게 대답한다. ‘사랑은 무지개를 좇는 것이다. 사랑은 한때의 즐거운 꿈이다. 사랑은 착한 심장의 목소리다. 사랑은 설명으로 해결될 수 없는 찬란한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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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가 여덟 명의 이별을 다루며 그 이별에 억지로 필연성을 부여했다면, 은 거의 그 반대의 지점에서 일곱 명의 사랑을 다루며 역시 우연을 가장한 필연에 기댄다. 네 개의 에피소드(혹은 네 가지 사랑)는 별다른 고리 없이 스쳐지나가다 마지막에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일면 초현실적인 시공간에서 공존하게 된다. 그 순간 이들의 각기 다른 사랑은 평생 단 한 번도 보기 힘들다는 초자연적인 현상 안에서 그간의 갈등을 초월하는 사랑의 기적처럼 하나로 모인다. 문제는 각 에피소드가 전해주는 사랑이 지나치게 동화 속에 살고 있거나 이미 여러 차례 답습된 전형의 틀에서 도무지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영화 속 짝사랑의 수사나 사랑에 빠진 자의 행동이나 연인을 잃은 자들의 감정적 표현 등은 광고와 뮤직비디오가 사랑을 상품화하면서 이미 수백 번 반복해온 수준을 정확히 맴돌고 있다. 여기에는 이들이 살고 있는 시대나 계급적 배경 등이 기입되지 않으며, 이들은 게으르게 혹은 지나치게 순진하게 오직 사랑으로 연대(?)한다.
그나마 지금 이 현실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캐릭터는 그가 ‘프리허그’(Free hug)라는 최근의 현상을 체현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진만(엄태웅)이다. 그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짝이 없는 인물이지만, 영화의 메시지를 압축한 캐릭터다. 아마도 영화는 아무런 이유나 대가 없이 사람들의 외로운 마음을 안아주는 박애주의자에게서 사랑의 본질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프리허그 운동가’라니. 무식의 소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용어는 좀 이상하게 들린다. 금 모으기 운동, 책 읽기 운동, 반찬 남기지 않기 운동…. 아무 때나 ‘운동’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게 현실이긴 하지만, 도대체 이 운동은 무엇을 위한 운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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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물음은 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자못 심각한 가치나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다만 진만이 사랑하는 여자와의 이별을 감수하면서까지 프리허그 운동을 하기 위해 전세계를 방랑할 때, 그걸 개인적인 사랑이 만인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된 숭고한 순간이라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조금 과장을 해서 말하자면, 진만의 프리허그 운동과 거기에 화답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세상의 결핍을 덮어주는 집단 마법처럼 보인다. 그건 타자의 결핍과 내 안의 결핍이 마침내 서로를 대면하는 순간이 아니라, 그 결핍을 들여다보지 않기 위해 고안된 감상적인 제스처에 가깝다. 사랑이 집단 마법이 되는 시대의 ‘사랑’은 진심으로 타자의 결핍과 만나 고통할 줄 모르고 그저 행복이라는 환상 속에 머무르길 원한다. 낯선 상대를 포옹하며 감회에 사로잡히는 이 정체불명 ‘운동가’의 표정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세상에 눈을 감고 자신에게 감동하는 나르시시스트의 얼굴이다.
정동영·이명박같은 진만의 ‘프리허그 운동’
그래서 이 전파하는 사랑과 행복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외로움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면서도 진정한 소통 앞에서는 회피해버리고 마는 자들의 불길한 병적 증후군처럼 보인다. 사랑을 포옹하는 영화에 대한 이와 같은 날선 시선이 누군가에게는 휴머니즘에 대한 냉소로 보일지라도, 나는 이러한 휴머니즘의 일원이 될 바에는 차라리 냉소를 택하겠다. 정작 영화 내용보다도 흥미로운 건 영화가 묘한 방식으로 암울한 현재 대한민국의 대선 정국을 환기시킨다는 점인데, 여기 어쩌면 영화가 낭만화하는 사랑-포옹의 본질을 드러내주는 코미디 같은 상황을 소개한다. 대선을 앞두고 정동영은 ‘안아주세요’라는 캠페인을, 아직도 “배고프다”는 이명박은 ‘프리허그 운동’을 벌였다. 명목은 유권자와의 스킨십을 유도해서 국민의 결핍에 다가서겠다는 것이지만, 사실 이들은 포옹을 통해 자신들의 결핍을 채워줄 더 많은 유권자의 사랑, 즉 유권자의 한 표를 구걸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더 많은 사람들과 더 많은 사랑을 나누지 못해 마음에 불이 차오른다는 의 프리허그 운동가 진만씨, 당신은 위의 두 정치인이 벌린 두 팔에도 따뜻한 사랑의 이름으로 기꺼이 몸을 맡기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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