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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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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오래 보고싶다, 그들의 싸움

등록 2007-12-14 00:00 수정 2020-05-03 04:25

복잡한 남녀관계 파고든 한지승 감독의 영화 , 드라마로 만들면 어떨까

▣ 김봉석 영화평론가

한지승 감독의 TV 드라마 가 이별, 이혼 이후의 사랑을 이야기한다면, 그의 영화 은 이별 이후의 다툼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왜 헤어진 이후에야 서로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그들은 왜 헤어진 뒤에도 계속해서 다투게 되는 것일까? 사람들은 때로, 잃어버린 뒤에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고생해서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보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때 무엇인가를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기쁨보다는 슬픔이, 즐거움보다는 고통이 더욱 강렬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에서 유리공예가인 진아(김태희)는 활달하고 직설적인 여성이다. 생물학 교수인 상민(설경구)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리되지 못하면 참을 수 없는 남자다. 게다가 이유를 알고 싶어하는 여자와 그럴 수도 있지, 라고 넘겨버리는 남자의 특성이 더해지면 반드시 다툼이 시작된다. 그렇게 싸우는 일이 반복되면서 그들은 헤어졌다. 거기서 끝나면 좋겠지만, 상민은 진아에게 돌려받아야 할 물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진아는 그걸 가져왔는지,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돌려달라는 상민과 못 주겠다는 진아는 필연적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처럼 완벽한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처럼 공동의 적을 만나서 힘을 합치는 것도 아니다. 은 두 사람이 싸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게 되고, 그러면서도 두 사람이 사랑하고 결혼까지 했던 이유까지 밝혀낸다.

한지승은 오로지 남녀의 멜로물만 만들어온 감독이다. 하지만 청춘남녀의 밀고 당기는 사랑 이야기보다는, 남녀의 만남에서 야기되는 파란만장한 관계와 사건들을 담아내는 데 더욱 충실했다. 데뷔작인 (1996)는 돌연한 사고로 아내가 죽은 뒤에 유령이 되어 돌아오는 슬픈 이야기였다. (1998)은 연애물이지만, 당시로선 흔치 않았던 연상녀 연하남 커플의 이야기였다. (2001)에서는 천신만고 끝에 아이를 낳은 부부가, 아이의 수명이 단 하루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한지승은 사랑의 매혹적인 순간보다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겪어야만 하는 극적인 사건들을 치밀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관객을 웃기고 울린 감독이다.

부터 이어온 파란만장 멜로

그런 점에서 TV 드라마는 한지승에게 더욱 어울리는 무대였다. 남녀가 만나서 사랑을 하지만, 거기에는 완결된 종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한다고 서로 믿고 확인하는 순간 진짜 현실의 문제가 시작된다. 그것도 해일처럼 한 번에 끝장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밀물과 썰물처럼 들고 나기를 거듭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일상이 변형돼간다. 그 미세한 감정, 흔들리는 일상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장시간의 드라마가 2시간짜리 영화보다 우월할 수밖에 없다. 드라마 는 한지승의 장기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낸 작품이었다. 아이가 죽은 뒤, 관계에 균열이 생기면서 결국은 헤어진 남녀가 겪는 사랑 이야기. 다른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기도 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파장이 일어나는지를 는 섬세하게 그려냈다.

처럼, 은 이혼한 남녀의 이야기를 그린다. 의 은호와 동진은 서로를 그리워한다. 헤어지기는 했지만,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의 주위를 맴돌면서, 서로를 들여다본다. 의 진아와 상민은 분명한 성격 차이 때문에 헤어졌다. 서로가 상대의 어떤 점을 못 견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의 오프닝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진아와 상민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영원히 함께하겠다고 결혼을 약속하는 장면이었다.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시작했다가, 역시 그렇구나, 라며 돌아선 부부였다. 그래서 이별한 그들은 싸울 수밖에 없다. 은호와 동진처럼 다시 서로를 지켜보는 과정이 그들에게는 의미가 없다. 은호와 동진이 서로에게 다가가기 위해 티격태격한다면, 진아와 상민은 싸우다가 상대방을 측은하게 여기게 된다. 서로 못 견뎌하는 점이, 서로 보듬어줘야 할 상대의 약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미칠 듯한 열정 뒤, 지독한 현실 ‘결혼’

생물학적으로만 본다면, 사랑이라는 감정은 6개월을 지속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후는 이미 다른 감정이나 이성이라는 것이다. 와 은 미칠 듯한 열정으로 상대에게 빠져드는 기간이 지나고 난 뒤, 게다가 지독한 현실인 ‘결혼’을 겪은 남녀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여준다. 한지승이 와 에서 파고드는 것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남녀의 복잡한 관계다. 청춘남녀처럼 그저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다는 이유만으로 관계를 지속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인 ‘결혼 이후’ 남녀의 모습을, 한지승은 매력적으로 그려낸다. 아주 사실적으로, 그러면서도 지극히 만화적인 과장을 곁들여 상큼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에 비해 은, 오로지 싸움 그 자체만을 보여준다. 아무리 싸움이 뭔가를 지키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해도, 격렬한 증오에는 사랑이 수반되어 있다고 해도, 그들의 쉴 새 없이 교차하는 미움과 그리움을 잡아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과정들이 필요했다. 은 마치 드라마의 압축판처럼 너무 빠르게 사건들만을 보여준다. 겨우 2시간 정도로는 그들의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제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싸우다 그리워하고, 또 싸우다 과거를 돌아보는 정도로는 그들에게 공감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싸우다가 그리워지고, 그리워하다가 미워지는 격렬한 그들의 감정이 정말 궁금해져서, 드라마로 만들어진 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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