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사관의 문화전파론 벗어나 고대 한일교섭사 새로 쓴 박천수 교수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일본과의 교류 역사를 이야기하면 한국인들은 대개 ‘조상들은 일본의 은인’이라는 자부심부터 깐다. ‘백제·신라 등이 미개한 일본에 수준 높은 문화와 기술, 제도를 일방적으로 전해주었다’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이는 곧 일본이 ‘배은망덕하다’는 논리로 종종 뛴다. 일본보다 우월했다는 민족주의 사관 아래 숱한 역사서, 심지어 교과서도 일방적인 문화전파론을 가르쳐왔다. 반면 일본학계는 지금도 4~5세기 왜군이 출병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에 휘둘린 이들이 적지 않다.
이 땅의 일본인 무덤 외면해온 학계
고대 일본은 일방적인 수혜자였을까. 침략자였을까. 기원 직후부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7세기 중엽까지 일본 열도와 한반도 사이에 벌어진 교류의 실상은 무엇일까. 1990년대 일본 오사카대학에서 수학하면서 한-일 고대 교류사 유적들을 외롭게 연구해온 박천수 경북대 교수는 최근 역저 (사회평론 펴냄)를 통해 피할 수 없는 ‘팩트’(사실)들을 상기시킨다. 일본 땅에 널린 선조들의 유적 못지않게 이 땅에 왜인들이 남긴 유적·유물 또한 숱하게 널려 있다는 것을.
80년대부터 3~6세기 전형적인 일본의 귀족 왕묘 무덤인 장고 모양 고분, 이른바 ‘전방후원분’이 전남 영산강 유역의 고흥·영광·광주 등지에서 13기나 발견됐다. 경남 해안 일대에서도 왜식 무덤, 동모·투겁창 등의 고대 일본산 무기, 갑옷, 일본식 야요이 토기 등이 숱하게 출토된다. 단순 무역이 아니라 정착하고 대를 이어 영주했으며, 큰 무덤으로 지역 권력을 과시한 징표 등이 속속 드러났다. 국내 학계는 외면하거나, 제 논에 물대기식으로 해석해왔다. 서울 강동 지역에서 백제 왕조가 쌓은 최대 규모의 전방후원분이 발견됐으며, 이것이 일본 전방후원분의 원형이라고 보도한 2005년 한국방송의 오보 파문은 이런 사고방식이 빚은 해프닝으로 기억된다. 저자는 관련 목록만 100쪽에 가까운 한-일 고고발굴 자료를 들고서 힘주어 말한다. “고대 한-일 교류사에 자꾸 근세나 현대의 갈등관계를 투영시키면 안 된다. 실제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발굴 유물들이 던지는 목소리에 귀기울여 미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는 20년 이상 한-일 발굴 현장을 누빈 전문가의 시각으로 한-일 교류사를 처음 고고학적으로 재구성했다. 그가 보기에 철기시대인 기원전 300~400년께부터 신라의 삼국통일기인 7세기까지(일본 시대 구분으로는 야요이시대부터 아스카시대까지) 한반도와 일본의 고고학은 경계가 없다. 무덤, 주거지 등의 유적과 장신구, 도구, 무기류 등은 형식이나 얼개가 거의 같다. 따라서 근대 민족주의의 그림자를 걷고 고고 유물에 바탕해 한-일 교류사를 정리하면 흥미롭고도 당혹스러운 몇 가지 가설이 나타난다.
우선 5~6세기 전라도 일대의 남도 지역은 일본 규슈 땅의 왜인 귀족들이 다스렸다고 본다. 백제는 통치권이 미약한 남도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일본 규슈 땅의 왜인 귀족들을 관료로 데려와 부렸다는 것이다. 광주 도심의 명화동, 월계동, 함평 신덕 고분 등 전라 지역 전방후원분이 그들이 누린 권세를 증명한다. 뿐만 아니다. 남해안과 경남·북 내륙에 포진한 금관가야, 대가야 등의 가야연맹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일본 열도 한가운데인 긴키지방(오늘날의 오사카·나라 일대)의 야마토 정권은 물론이고 규슈, 시코쿠, 심지어 오늘날 도쿄 인근의 간토지방 세력과 동맹관계를 맺고 철 수출은 물론 무기류, 장식품 등의 위신재(신분이나 권위를 표시하는 물건) 등을 교역하는 데 열을 올렸다. 왜와 적대적 관계로 인식된 신라도 5세기 전반 금관가야 쇠퇴 이후와 6세기 후반 대가야 멸망 뒤 일본 각지의 세력과 교역하면서 대일본 교류의 주도권을 행사했다고 박 교수는 주장했다. 유명한 경주 황남대총의 출토품 ‘곱은옥’(초승달 모양의 장식구슬)이 일본산이라는 논쟁적 주장과 일본 중앙 긴키지방의 이 시기 주요 고분에 신라제 말갖춤과 금동 장식구가 다수 묻혔다는 사실 등이 근거다.
“전라도 일대는 왜인 귀족들이 다스려”
그는 또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을 비롯한 공주·부여 지역에서 발견된 일본식 동굴 무덤인 횡혈묘는 백제 왕도에도 적지 않은 왜인이 살았음을 시사한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기원 전후부터 7세기까지 700년간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는 오늘날보다 훨씬 밀접했을 뿐 아니라 범국민적인 혐한·반일 대립 감정은 사실상 없었다. 같은 생활권·경제권으로서 서로가 존립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제휴 동맹의 대상이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한반도 삼국 간 국경을 넘나드는 것보다 바다로 왜국과 왕래하는 것이 훨씬 쉬웠을 정도”였다. 저자는 일방적인 식민지배를 뜻하는 임나일본부는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일본에 가야·백제 등에서 준,위신을 과시하는 장식품과 토기가 숱하게 발견되고, 한반도에서는 왜인들의 무덤과 무기류 등이 부장품으로 발견되는 것도 그 방증이다. 두 세력이 철과 문물, 군사용병 등의 조건을 놓고 맞춤한 거래관계를 이어나갔다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단절되고서는 존립할 수 없는 시대 상황에서 합리적인 정치적 교섭 아래 관계를 지속했다는 것이다. 낯선 일본의 한반도계 유적들도 이를 뒷받침한다. 전라도 원주민과 가야 출신 이주민의 유물이 공존하는 일본 하카타(후쿠오카)의 3~4세기 마을 유적 니시신마치는 영산강 지역과 가야 권역의 토기와 부뚜막 시설이 뒤섞여 발견된 ‘이주민 타운’으로 드러났다. 금당벽화로 유명한 일본 나라 호류지 근처의 후지노키 고분은 신라와 백제에 교섭 창구를 가진 왜의 왕족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전형적인 신라의 말갖춤이 발견됐다. 껴묻거리(부장품)로 백제계 관과 신발, 가야계 말갖춤에다, 귀고리는 백제계와 가야계를 섞어넣은 구마모토의 에타후나야마 고분, 사실상 가야계 이주민들의 집단 무덤으로 고분과 형태는 물론 출토품도 거의 가야 무덤과 똑같은 니자와센쓰카 고분군, 도쿄 인근의 간토지방 고분의 가야계 출토품 등의 사례들도 소개된다.
기존 견해와 달라 논쟁거리 될 듯
저자는 결론적으로 3~5세기 일본 열도와의 교류 중심은 가야였으며,백제는 6세기 초부터 교류를 본격화했고, 그 사이 간간이 신라가 끼어들었다며 갈래를 짓는다. 이는 4세기 후반 이래 백제가 고대 한-일 교류의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기존 문헌사학자들의 견해와는 상당히 다른 것으로 논쟁거리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권오영 한신대 교수는 “박 교수의 저작은 그동안 우리가 일방적으로 일본에 문물을 다 전해줬다는 민족주의 편향의 인식을 깨는 첫발”이라며 “이 책은 ‘우국지사의 말투로’ 고대 한-일 교류사를 재단하는 시대가 지났음을 웅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박 교수는 지난 10월 일본 출판사 고단샤를 통해 같은 내용을 담은 일어판 연구서 를 출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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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일 교류사의 실상을 증언하는 전시나 복원 유적들은 국내에서 찾아보기가 어렵다. 지난 10월16일~12월2일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요시노가리, 일본 속의 고대 한국’전은 모처럼 고대 한-일 교류사를 화두로 다루었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일본 규슈 사가현의 청동기시대 대형 마을 복원 유적인 요시노가리의 농경, 생활 유물들을 한반도에 있는 동시기 유적, 유물과 비교 전시했다. 토기, 꺾창, 거울 등 대다수 유물들이 한반도 것과 거의 똑같거나 비슷해 눈길을 끌었지만, 국내 전문가들은 적잖은 아쉬움도 표시했다.
요시노가리는 세계적인 교류사 유적 공원으로 복원됐으나 이에 비견될 국내의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주거 터인 충남 부여 송국리 유적은 흙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고대 주거문화의 획기적 단서가 된 송국리 유적의 추정 면적은 80만여 평으로 요시노가리(40만여 평)보다 훨씬 방대하며 시기도 기원전 7~8세기로 앞선다. 70~90년대 국립박물관 등에서 여섯 차례 조사를 했으나 유적 추정 지역의 10분의 1 정도만 발굴하는 데 그쳤고, 지금은 모두 흙을 덮어 언덕배기와 밭 풍경밖에 볼 수 없다. 부여군은 조사단을 구성해 내년부터 발굴을 재개하고 2017년 복원공원 개관도 추진하기로 했으나, 관련 예산은 1억원에 불과하다. 전문가들은 “국가 차원에서 추가 발굴과 복원 사업계획에 나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미술관에 소전시로 차려진 ‘계룡산 분청사기’전(2008년 2월17일까지)도 한-일 문화교류사 연구에 대한 국내의 인식 수준을 보여준다.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계룡산 기슭의 가마터에서 1927년과 92년에 캐낸 분청사기 조각들을 전시 중인데, 이들 사기 조각의 간단치 않은 내력은 거의 묻혀 있다. ‘계룡산 분청사기’로 불리는 이곳 분청사기 조각들은 조선시대 일본의 영주들에게 일급 다기로 수출됐던 명품. 일본에서는 매우 유명한 가마터다. 국내 일반인들은 이름을 아는 이조차 드물지만, 일본에서는 고려 다완의 성지로 알려져 답사객이 끊이지 않는다. 현지 주민들이 ‘여기는 일본 도자기 가마터’라고 말할 정도다. 학봉리 출토품은 특유의 익살스런 물고기 무늬, 비늘 표현의 독창성이 뛰어나 일본에서는 다도구의 명품으로 손꼽힌다. 김영원 박물관 미술부장은 “학봉리 가마터의 사기들은 지금도 일본 도공들이 다기 디자인에 베낄 정도로 영향력이 지대하다”며 국내의 무관심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이런 내력들을 대형 기획전 등을 차려 드러내지 않고, 좁은 상설전 전시장 귀퉁이에 발굴품만 주섬주섬 챙겨 보여주는 전시 구성의 옹졸함 또한 납득하기 어렵기는 매한가지다.
*사진제공 사회평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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