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모독’ 차원으로 사회를 풍자해낸 연극
▣ 장성희 극작가·연극평론가
아직도 우리에게 조롱할 거리가 남아 있을까? 윤리와 도덕적 기준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경제 제일 원칙과 ‘돈되는 것’의 가치로 재조정되고 있는 이즈음이다. 당연히 우리 시대를 조롱하려 한다면, 자신의 몸을 우선 금 밖으로 빼내야 한다. 쑥대밭 된 세상을 향해 목검이라도 휘두르려면 먼저 풍자의 언어를 벼려야 한다.

지리산 계곡의 산부인과가 배경
최근 연극이 한국 사회를 풍자하고 조롱하는 방식은 연출가에 따라 나름의 특징이 있다. 이윤택, 채윤일씨는 정색을 하고서 격정적인 낭만주의를 빌려 독백을 쏟아낸다(). 황지우, 이상우씨는 출구 없는 허무주의의 가면을 쓰고 무대 놀음을 하며(), 김광림씨는 선명한 우화적 구도를 끌어들였다(). 그런데 극작가 겸 연출가로 활동 중인 박근형씨의 경우는 더 나아가 ‘관객 모독’의 차원에 이른다. 12월2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막을 내린 그의 신작 (극단 골목길)는 현실의 질서와 논리, 가치를 희극풍으로 뒤엎는 특유의 거리두기 전략이 도드라졌다.
는 무대와 객석 사이에 있는 ‘제4의 벽’을 우리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을 되비추는 거울로 바꾼다. 연출가 박씨는 란 전작에서 더 이상 청정지역일 수 없게 된 ‘울릉도’에 빗대어 일상화한 한국 천민자본주의의 세속성을 날카롭게 까발린 바 있는데, 신작에서 다시 사실적 공간인 ‘경남 함양군 백무동’을 우의적 공간으로 바꿔놓고는 예의 ‘관객 모독’식 풍자 무대를 펼쳐나간다.
이름난 지리산 계곡인 ‘백무동’ 하면, 당연히 세속의 더러움을 씻을 만한 선경, 비경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극중에서는 그 명소의 실상이 그렇지 못하다는 게 연극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역설이 된다. 극은 백무동에 있는 한 산부인과 병원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수간호사 역의 배우(황영희)가 말똥말똥한 시선으로 객석을 쓱 둘러보고 지나가는 것으로 막이 오른다. 환자용 철제 침대 3개만 달랑 놓여 있는 무대에서 풍자의 난장이 흘러간다. 낙태 시술로 성업 중인 산부인과 공간, ‘어르신’과 유림들이 나라와 마을의 장래를 염려하며 소일하는 공간, 미국 유학 중 잠시 귀국한 병원장 아들과 친구들의 위태로운 고속도로 귀향길 주행 공간 등이 교차 편집하듯 넘나들며 펼쳐진다.
자연 풍광 뛰어난 백무동 마을에 상서로운 새라는 노랑부리제비가 출현하면서 황당한 박근형 식의 ‘관객 모독’이 벌어진다. 하늘의 축복으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잠시 ‘커뮤니케이션’만 해도 누구나 임신하고 아이를 낳는다. 마을이 다산의 유토피아로 흥청거리게 되는 것이다. 급기야 근엄한 유림 어르신(윤제문)이 임신을 한다. 출산을 거부하는 요즘 아랫것들을 대신해 국가와 민족의 유구 생생 존립을 위해 드디어 나선 것인가? 병원장 부인인 부원장(고수희)의 삶에 대한 맹목적 성실성과 도덕적 나르시시즘, 피고용자를 철저히 착취하는 궤변 등을 통해서도 극은 우리 사회 중산층의 삶의 가치관과 수사학을 마구 조롱한다.
무기력한 젊은이 vs 왕성한 노인들
극중의 젊은 세대는 풍요 속에서 환락과 소비에 몸을 맡긴다. 삶의 의욕이 별로 없고, 무기력과 불감증으로 기성세대의 도덕적 파멸을 흐릿한 눈으로 응시하는 모습이다. 마약과 속도에 중독되어 삶을 빠르게 소진해가는 그들과 달리 노인들은 왕성한 생식력과 의욕으로 삶을 연장한다. 세상이 이렇게까지 뒤죽박죽 무너지는 형국인데, 당신들 삶은 고상하고 안녕한가 하고 무대는 마치 묻고 있는 듯하다.
는 대한민국 삼대에 걸친 정신적 붕괴를 고발하는 현장보고서에 가깝다. 전통으로 치장하고 박제된 말법으로 시국과 세태를 논하며 소일하는 노인층, 부의 잘못된 축적과 노동 가치의 왜곡 등 도덕적인 파렴치 행위를 일삼는 중년층, 윤리의 방어선을 넘어 다른 세계로 가버린 젊은이들의 냉소주의 등을 축약해 보여준다.
유림이 엽총을 마구 쏘아 젊은이들이 죽고 난 뒤의 마지막 장면. 백무동의 빈 곳을 채울 양 불구인 병원 사무장이 제 어미의 배 위로 올라간다. 그가 그곳에서 새 생명이 잉태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데 이르러서는 그로테스크함마저 느껴진다. 무대는 ‘울릉도’에 이어 ‘백무동’까지, 섬과 오지가 남김 없이 한통속으로 속물 공화국이 되어가는 악몽을 보여준다. ‘대한민국 여기가 당신들의 나라거든요’ 라고 기이한 관광 유람을 시켜주는 악몽. 관객은 이제 그만 깨어나고 싶어진다.
아쉬움도 있다. 연극 전반에 걸쳐 은유에 가까운 몇몇 장면들은 풍자와 조롱의 의도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단순한 비유와 풍유법으로 다소 심드렁해지는 느낌도 주었다. 이러한 약점들을 공간을 이어붙이고 비약하는 연출력이 메워간다. 박근형 연극에서 하나의 ‘상징 기호’가 되어버린 경상도 사투리는 이 연극에서도 ‘의리’와 ‘정’을 나누는 정서적 지표 너머의 것들을 드러내는 요소다. 권력 간 위계질서와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기심과 타자 배제 따위의 그늘을 적절히 드러내면서, 사회의 허위의식과 미성숙을 조롱하는 데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다.
한국의 도덕적 침몰을 수긍할텐가
테드 코언은 그의 저술 에서 “어이없는 것을 보고 웃는 웃음은 ‘이해할 수 없는데도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 자신의 고백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는 한국 사회 전반의 도덕적 침몰을 어이없어하면서도 씁쓸히 수긍할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의 초상과 마주하도록 만든다. 뚜렷한 공격 대상을 정하고, 신랄한 조롱과 풍자를 마냥 퍼붓던 희극의 시대는 갔다. 극장은 더 이상 냉소와 혐오에 머물지 않고, 사회에 대한 염려와 궁리를 함께 모색해야 하는 마당이 되어가고 있음을 이번 무대에서 새삼 느꼈다. 극단 쪽은 내년 초 를 재공연할 예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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