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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괜찮아 인순아 넌 예뻐

등록 2007-11-30 00:00 수정 2020-05-03 04:25

별 중의 별, 살인의 별을 단 여자의 설득력 있는 절망과 씩씩한 위로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모처럼 만의 설득력 있는 절망이다. 인순이에겐 과거가 있다. 흔하게 예상할 과거가 아니다. 전과다. 그것도 살인 전과다. 세상엔 두 개의 계급이 있다. 별이 달린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기도 폭행도 아니고 살인이라니 별 중의 별, 살인은 지우기 힘든 주홍글씨다. 이렇게 한국방송 수·목 드라마 (이하 )는 지금껏 안방에서 보기 힘들었던 ‘시추에이션’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인순이(김현주)는 혼혈 가수의 고유명사에서 소수자의 대명사가 된 이름이다. 어렸을 적에 부모를 잃고 할머니와 살던 착하디착한 인순이는 어쩌다 친구를 죽였다. 고등학교 시절에 자신을 집단 폭행하던 친구들 중의 한 명을 실수로 죽인 것으로 나온다. 게다가 할머니도 인순이를 면회 오다 숨졌다. 인순이는 자신에게 지독한 악운이 씌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희망은 살아서 인순이는 되뇌었다. “감옥만 나가면, 엄마만 있으면” 감사하며 살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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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을 술술 풀어내고 귀를 기울이다

하지만 세상이 그런가. 인순이는 감옥도 나오고 죽은 줄 알았던 엄마도 찾지만 여전히 세상은 지옥이다. 마땅히 감사할 줄 알았던 상황에 도저히 감사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세상이 멸시하는 비밀을 간직한 자들에겐 숨어 있을 자기만의 방이 차선의 피난처가 된다. 하지만 스스로 커밍아웃하지 않아도 기록이 커밍아웃시켜버리는 전과자에겐 자기만의 방도 없다. 그래서 전과의 지뢰는 어디서 터질지 모른다. 어렵게 직장을 구해도 쫓겨나기 십상이고, 누군가 무심코 내뱉는 말에도 주홍글씨는 새겨져 있다. 인순이의 중학교 친구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척하던 상우(김민준)가 아무런 생각 없이 내뱉는 “범죄형 얼굴”이라는 말처럼 말이다. 어릴 적 헤어진 엄마를 만나도 차마 그것만은 말하지 못한다. 그래도 착한 인순이는 제 발이 저려서 전과를 숨기지 못한다. “어차피 알게 될 거니까”라는 이유로, “저, 저기요…”라는 용기로 인순이는 전과를 먼저 고백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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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세상의 코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크나큰 상처를 주는 딜레마가 반복된다. 인순이가 남들에게 무시당할까봐 감싼답시고, 상우는 인순이를 영국 왕립 디자인스쿨에 다녔다고 “영국으로 유학 보내고”, 인순이의 어머니 이선영(나영희)은 인순이가 이탈리아에서 자랐다면서 ‘이탈리아로 이민 보낸다’. 당연히 그들의 배려는 인순에게 상처다. 더구나 인순이는 엉겁결에 나오는 “엉”으로 그들의 거짓말에 부역해야 하는 형편이다. 인순이를 좋아하는 방송사 기자인 상우를 통해서 우리는 시험에 든다. “전과 때문에 취업에 제한을 받아선 안 된다”고 공자 왈 맹자 왈을 되뇌던 상우는 인순이에게 진심으로 끌리는 자신을 보면서 자문을 던진다. 살인 전과를 가진 사람을 당신의 가장 ‘나종’ 지니인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그것은 가 던지는 극단의 질문이다. 이렇게 는 타인의 시선과 자신의 진심 사이에서, 당신은 진심을 선택할 용기가 있느냐고 묻는다.

에는 비밀이 많지만 비밀을 빌미로 질질 끌지 않는다. 오히려 술술 풀린다. 상우가 인순이의 전과를 알게 되는 데 한두 회의 시간이면 충분하고, 인순이가 20여 년 만에 엄마를 만나고 엄마에게 인순의 비밀이 알려지는 시간도 빠르게 지나간다. 이렇게 거두절미 스피드가 빠르다. 는 오히려 비밀이 밝혀진 이후의 상황에 시선을 모으고 귀를 기울인다. 비밀이 밝혀진 이후에 닥치는 시련은 오히려 뿌리가 깊은 탓이다. “괜찮아. 괜찮아. 인순아. 난 착해. 난 예뻐. 난 사랑스러워. 난 훌륭해. 난 누구보다 특별해. 특별한 존재는 원래 시련이 많은 거야.” 인순이를 유일하게 이해해주었던 선생님과 약속한 대로 하루에 12번씩 이렇게 주문을 외워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씩씩하게 굴어도 인순이는 안다. “아무리 그 따위 주문을 외워도 현실이 바뀔 리 없단걸.” 이렇게 출구가 없는 시련이지만, 는 절망하되 좌절하지 않고 처절하되 과장하지 않는다. 에서 시작된 표민수 드라마의 장점이다.

최후의 한 사람만 있다면…

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 누구도 죄인으로 만들지 않는다. 인순이를 좋아하는 상우에겐 속이지 못하는 속물 근성도 적당히 있지만, 속물 근성을 넘어서려는 의지도 있다. 20년 만에 만난 엄마도 무조건 딸에게 애정을 베풀지도, 무작정 미워하지도 않는다. 유명한 배우인 엄마는 이기적인 인물이지만 인간적인 면모도 없지 않다.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20년 만에 만난 딸에게도 며칠 만에 짜증을 낸다. 그러면서도 기자들 앞에서 인순이의 존재를 알린다. 물론 언제나 남의 눈에 보이는 나를 보며 살아온 엄마는 딸의 전과를 알고 나서 말한다. “남부끄러워서 어떻게 살아.” 인순이는 “엄마라면 ~해야 하지 않나”라는 기준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엄마를 떠나지만 돌아온다. 돌아온 인순이에게 엄마는 미안하다고 말하지만 역시나 엄마는 변하지 않는다. 이렇게 의 캐릭터에는 현실감이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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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엄마만 있으면” 다르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인순에게 엄마가 나타나지만 인순의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는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자신을 사랑해줄 한 사람이 있다는 확신을 찾아가는 드라마다. 최후의 한 사람만 있어도 인순이는, 우리들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인순이와 엄마, 인순이와 상우 사이에 편견을 넘어서는 확신이 생기는 과정을 보여주는 드라마다. 인순이는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자 세상의 저편에서 이쪽으로 넘어온다. 인순이가 죽으려고 지하철 선로에 다가갈 때마다 마지막 순간에 그를 뒷걸음질치게 만든 것은 “인순이”를 부르는 목소리다. 누군가 이름을 부르자 인순이의 오늘보다 뻔한 내일에 그래도 희망이 보인다. 인순이가 헤쳐가는 길은 마이너리티에 보내는 응원가다.

오랜만에 드라마로 돌아온 김현주의 한층 깊어진 연기는 인순이의 인생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여기에 말의 리듬과 화면의 리듬이 화음을 이루는 표민수 PD의 연출이 뒷받침한다. 남들이 위한답시고 해버린 거짓말에 어쩌지 못하고 부역을 하면서 인순이가 되뇌는 한마디, “그래도 100%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애”. 이렇게 는 슬프고 씩씩한 거짓말 같은 위로다.

차별금지법의 ‘인순이’ 관련 항목

드라마 밖에서 한마디 더하면, 최근 논란 중인 차별금지법의 차별금지 영역에서 빠진 9개의 항목 중에 인순이 관련 항목도 있다. ‘범죄 및 보호처분의 전력’, 쉽게 말해 전과가 있다고 해서 차별당해선 안 된다는 항목이 차별금지법 차별금지 예시항목에서 빠졌다. 이렇게 그 법의 조항은 죽은 활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생에 관련된 것이다. 인순이는 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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