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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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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원이 있어 행복하지 아니한가

등록 2007-11-16 00:00 수정 2020-05-03 04:25

B급 감수성을 품은 주류 배우, 한국방송 드라마 의 예지원

▣ 차우진 〈매거진t〉 기자

예지원은 흥미로운 배우다. 배우가 궁금하려면 필모그래피가 흥미롭거나 사람이 재미있어야 하는데, 사람은 알 길이 없으니 이 말은 그녀가 지금까지 맡아온 배역에 대한 얘기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예지원이란 배우가 흥미로운 건 그녀가 지금 차지하고 있는 자리 때문이다. 짐작하고 있겠지만 지금까지 예지원이 걸어온 궤적, 이를테면 이라는, 제목부터가 80년대의 은밀한 동시상영관을 떠올리게 하는 저예산 영화가 붙여놓은 꼬리표를 에서 우스꽝스럽게 비틀어 떼버린 뒤, 곧바로 뜬금없이(혹은 너무나 예상 가능하게도) 의 성매매 여성의 자리를 ‘미니스커트를 입고 국회의사당 담을 뛰어넘듯’ 휙 지나친 그녀가 비로소 로 브라운관에 ‘입성’하기까지의 여정, 아니 질주에 가까운 달음박질은, 그녀를 지지하든 거부하든 그녀를 ‘아는’ 사람들에게 예지원이 독특한 배우의 자리에 서 있음을 알리기에 충분했다.

그가 아니라면 누가 저렇게 할까

하지만 그때까지 그녀는 좀 재미있긴 했지만 꽤 흥미로운 배우는 아니었다. 이 표현의 차이는 사실 굉장히 미묘하고, 그래서 와 의 간극 정도라고 비유적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브라운관에서 신들리다 만 ‘노처녀’(정치적인 입장과는 무관하게, 이 단어는 한국 사회에서 여러 가지 지표로 활용된다)로 등장했다. TV 드라마의 중력권에서 B급 장르물의 재기발랄함을 선사하는 한국방송 드라마 에서 정도 많고 의리도 많은 자본주의적 속물 아가씨를 연기하는 예지원이야말로 비로소 흥미로운 배우의 자리로 올라선 배우다. 물론 그녀는 여전히 의 미자를 안전하게 반복 재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고 그것은 분명히 배우 예지원의 재능이자 한계이기도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그녀에게 이런 비평은 무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한계가 한계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런 한계를 한계처럼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 또한 그녀의 고유한 능력이라는 건 분명하다. 그래서 예지원은 한국 여배우의 계보에서 기이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배우이기도 하다. 그녀가 아니라면 그 누가 프란체스카처럼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손가락을 휘저으며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걸어나오다가 엎어지는 캐릭터 아란샤를 연기할 수 있었을까. 그녀가 아니라면 과연 누가 가족같이 지낸 이웃들에게 느낀 배신감에 입술을 바르르 떨고 눈물을 흘리며 “이 나이 되도록 인생 어떻게 산 거야, 내가…”라는 대사를 내뱉을 수 있었을까. 그녀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 보잘것없이 시시한 삶의 진정성을 적절하게 그려낼 수 있었을까.

그래서 예지원은 보기 드물게 B급 감수성을 내재하고 있는 주류 배우다. 한국에서 여배우의 위치가 결국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다면, 그녀는 심지어 B급 에로영화의 주연배우에서 삼순이보다 더 ‘리얼’한 30대 여성의 딜레마를 재현한 브라운관 스타에까지 오른, ‘독한’ 배우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금 그녀가 차지하고 있는 이 자리는 그 어느 누구로부터 넘겨받거나, 그 누가 먼저 차지하고 있던 자리가 아니다. 그녀는 여기,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던 자리를 제힘으로 만들었다. 겨우 몇 년 전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입장으로는 도저히 지지할 수 없었던 의 그녀가 이렇게 흥미만발한 배우가 되리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따라서 에서 본명으로 등장해 자신에게 프러포즈한 남자들을 의도하지 않게 차례차례 죽여버리는 이 여배우와 에서 좌충우돌 푼수에 변덕에 너저분한, 기이하게 꼬인 인생 한번 뒤집어보겠다고 보물이나 찾아나서는 서른 넘은 노처녀를 연기하는 예지원을 보고 있으면, 우리에게도 이런 여배우 하나쯤 있어서 행복하다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아한 그녀

사실 예지원은 우아하다. 동의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겠지만, 아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라, 그녀는 우아하다. 무용 연습실에서 음악도 없이 남자들을 앉혀두고 재즈댄스와 살사, 고전무용까지 선보이던 그 순간부터 그녀는 우아하고 참으로 진지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우아함은 그녀가 우리와는, 혹은 다른 배우들과는 다른 ‘필드’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넘어지고 엎어지고 조폭에게 바친 순정마저 이용당하는 그 순간에도 허투루 연기하지 않는 배우다. 그런 의심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배우다. 말장난 같지만, 그녀는 배우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그야말로 배우처럼 보여주는 배우다. 이것은 그녀의 연기가 전형적이라는 비판도 소용없을 정도로 강한 설득력을 갖는다. 영화든 TV든, 코미디든 드라마든 간에 매체와 장르에 상관없이 예지원이란 배우가 반짝이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지금 그녀는 누가 뭐래도 한국 대중문화 시장에서 자기 지분을 확고히 가지고 있는 보기 드문 여배우다. 먼저 의 그녀를 보라. 한국 대중문화 시장에 예지원이라는 배우가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스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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