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으로 내세운 직업조차 상상 속 이미지대로만 그린 SBS 드라마
▣ 강명석 〈매거진t〉 기획위원
SBS 수·목 드라마 에서 해리(송일국)와 마리아(장진영)는 어린 시절부터 총과 인연을 맺는다. 두 사람은 모두 어린 시절 아버지가 총에 맞아 죽었고, 해리는 어린 시절 여동생 수지(최자혜)를 미국인 고모부의 성폭행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총을 쐈으며, 마리아는 마피아의 하수인 마이클(김준성)이 자신의 삶의 터전인 버스를 부숴놓자 총을 들고 가서 그를 위협한다. 에서 총은 들기만 하면 사람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을 갖는다. 그리고 해리와 마리아가 무기 로비스트가 되기로 작정한 것도 힘을 얻기 위해서고, 국정원장 태성(이재용)과 로비스트 제임스 리(허준호)처럼 힘을 가진 자들은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 움직인다.
도박판서 돈 잃어주기와 성로비
총을 들고 있으면 그 순간만큼은 절대적인 힘을 갖듯, 의 역학관계는 힘의 우위에 따라 결정된다. 힘을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를 마음껏 유린한다. 태성은 장군으로 재직하던 시절 무장공비를 처음으로 발견한 마리아의 아버지(성지루)를 강제 연행해, “택시기사가 군보다 먼저 공비를 발견한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협박해 신고 내용을 번복하도록 만들고, 마리아의 언니 에바(유선)를 자동차 폭파 사고로 죽도록 조작하며, 언론과 검사까지 통제해 에바의 죽음이 알려지지 않도록 만든다. 또 어둠의 세계에서는 마이클이 해리와 에바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처럼, 마피아들이 권력을 잡고 약한 자들을 괴롭힌다. 태성과 마피아의 자금으로 무기 거래를 하는 마담 채(김미숙)가 서로 협조하고, 원래 ‘아는 사이’였다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국정원장이건 마피아건, 권력을 가진 자들은 공생한다.
그래서 는 로비스트를 주인공으로 하면서도 ‘로비’는 존재하지 않는다. 총을 가졌을 때처럼 가진 권력에 따라 모든 결과가 결정되는데 법과 제도, 논리와 자료 등을 통한 설득과 협상은 아무런 힘도 가질 수 없다. 의 로비스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도박으로 미국 국회의원에게 돈을 잃어주며, 마리아처럼 아랍 유력 인사에게 ‘성로비’를 해야 하느냐 마느냐를 고민하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의 로비스트는 마리아처럼 별다른 사전 지식이 없어도 ‘눈빛’이 좋으면 할 수 있는 직업이 된다. 는 로비스트의 세계를 그리면서도 그들을 현실 속의 로비스트로 느끼게 하는 디테일한 묘사 대신, 우리가 과거 국정원과 마피아 등에 대해 막연히 상상했던 이미지를 반복하는 데 머무른다. 아프카니스탄 무장단체의 한국인 피랍 사건에서 국정원장이 협상 뒤 자신을 너무 어필했다는 이유로 국민의 비난을 받는 시대에, 국정원장이 언론과 검찰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다음 대권을 노리는’ 권력의 실세로 묘사되는 것이 다.
디테일이 사라지면서 해리와 마리아는 로비스트로서 전문적인 능력을 습득할 수 없게 되고, 이 때문에 그들은 매번 초법적인 권력처럼 묘사되는 국정원이나 마피아에게 쫓기거나 죽음의 위기를 넘나드는 일만을 반복한다. 해리와 마리아가 마담 채와 제임스 리의 가르침에 따라 불과 한 회 만에 로비스트에게 필요한 지식들을 대부분 습득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은 현실성과 디테일이 사라진 드라마의 궁색한 변명이다. 에피소드를 통해 로비스트의 능력을 보여줄 수 없으니 무협지의 주인공이 무협 익히듯 로비스트 업무를 익히게 된다. 여기에는 심지어 해리와 마리아가 천재라든가, 어린 시절부터 특출난 재능이 있었다든가 하는 설명조차 없다. 싸움에 관한 어떤 경력도 없는 해리가 마피아들을 여럿 때려눕힐 수 있는 건, 순전히 그가 드라마의 주인공이자 톱스타인 송일국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가 이렇게 허술한 이야기를 끌고 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야기 빈 자리, 제작비 120억만 꽉 차
는 이야기의 빈틈 사이에 제작비 120억원이 들어간 ‘한국형 블록버스터 드라마’의 티를 내기 위해 노력한다. 다른 드라마가 초반에 해외 촬영 분량을 대부분 다 쓰고 국내에서 스토리를 전개하는 것과 달리, 는 쉴 새 없이 미국과 한국을 오가면서 미국의 도심에서 사막을 지나 한국의 어촌에 이르는 다양한 배경을 보여주고, 초법적인 권력들에게 쫓기는 해리와 마리아를 통해 매 회 자동차 추격신이나 액션신을 보여준다. 그러나 첫 회의 대규모 총격전을 제외하면 차 두세 대의 추격전이 전부인 자동차 추격신이나, 의 제작사인 초록뱀미디어의 창립작이던 에서도 줄기차게 나온 주인공과 다수의 악역들의 주먹 싸움은 와 같은 ‘미드’가 함께 방영되는 지금 더 이상 좋은 볼거리가 되지 못한다. 는 한국 블록버스터 드라마의 시대를 여는 작품이라기보다는, 120억원의 제작비에 걸맞은 수익을 내기 위해 가장 안전한 길을 선택한 구시대적인 블록버스터다.
가 해리와 마리아의 관계를 굳이 어린 시절의 운명으로 묶고, 해리와 마리아가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혹은 가족의 의문사를 규명하기 위해 로비스트가 되어 뛰어든다는 설정은 이 드라마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재능을 타고난 주인공들이 가족을 위해 세상에 뛰어들어 힘을 얻는다는 설정은 한국 드라마의 가장 오래된 설정 중 하나다. 새롭지도, 정교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그러나 새롭지 않기 때문에 익숙하고, 단순하기 때문에 쉬우며, 화려하지는 않아도 매 회 톱스타들이 죽도록 도망치고 싸우는 것을 보며 만족할 시청자는 를 부담 없이 선택할 것이다. 마치 권력에 아무런 항의도 못하고 그들과 똑같이 ‘총’을 원하고, 다만 그 총을 어떻게 써야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인공들처럼, 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은 채 거대한 제작비가 요구하는 수익의 안정성을 순순히 따라간다.
‘힘·가족·국가’ 구시대 패러다임대로?
그래서 의 대중적인 흥행 여부는 지금 한국의 드라마 산업, 더 나아가서는 지금 한국인들의 현재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더 많아진 해외 로케이션과 총격전을 제외하면 120억원의 제작비로 어떤 새로운 시도도 하지 않고, ‘북한에 맞서려면 좋은 무기가 필요’하고, ‘미국의 힘에 대항하기 위해 군비를 증가’해야 한다고 낯뜨거울 정도로 뻔뻔하게 외치면서 지난 시절 대중을 지배했던 초법적인 ‘힘’에 대한 공포와 동경을 자극하는 이 드라마가 과 같은 성공을 거둔다면, 그건 우리가 여전히 ‘힘’과 ‘가족’과 ‘국가’를 하나로 묶는 구시대의 패러다임에 묶여 있다는 의미이다. 문화방송 드라마 와 의 등장으로 한국도 이제 100억원이 넘는 미니시리즈가 제작되는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혹시 늘어난 제작비는 그만큼 발전을 향해 가는 한국 드라마와 그것을 보는 대중의 행보를 더 무겁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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